김남득은 1340년(충혜왕 복위년)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공민왕 즉위 초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로 재직하면서 기강을 세우기 위해 홀치[忽赤]인 중랑장(中郞將) 정곡(鄭谷)을 처벌하였으나, 1356년(공민왕 5) 기철(奇轍) 등 부원세력이 숙청될 때, 그 당여(黨與)로 몰려 장형(杖刑) 처벌을 당하였다.
1366년(공민왕 15) 4월 인사에서 감찰집의(監察執義)로 기용되었고, 1370년(공민왕 19) 상주목사(尙州牧使)로 부임하였다. 상주목사 재직 때 관아를 중건하는 한편, 그 동북쪽에 과원(菓園)을 설치하고 가운데에다가 풍영루(風詠樓)라는 정자를 건립하였다. 이색(李穡)에게 부탁하여 기문(記文)을 지었고, 이숭인(李崇仁)이 시를 남겼으며, 권근(權近)도 뒤에 기문을 남김으로써 풍영루는 훗날 명승지가 되었다.
우왕 때 김남득의 활동은 확인되지 않다가 1389년 6월 공양왕이 즉위하여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청사(廳舍)를 건립할 때 감독관으로 활동하는데, 이때 그의 벼슬은 첨의평리(僉議評理)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서해도관찰사(西海道觀察使)로 왜구를 격퇴하였으며, 1390년(공양왕 2) 9월에는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승진하여 밀직제학(密直提學) 이지(李至)와 함께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1392년(공양왕 4) 4월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된 후, 6월에 정몽주 당여로 지목되어 우현보(禹玄寶)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추충익대공신(推忠翊戴功臣)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책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