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원세력은 원나라에 기대어 고려와 고려인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힌 정치세력이다. 부원배라고도 부른다. 몽골의 고려 침략에서 기원하였으며 고려가 몽골에 항복한 이후 더욱 확대되었다. 몽골의 고려 침략과 고려 영토 점령에 적극 협조한 부류와 몽골의 고려 내정 간섭에 적극 협조해 고려의 정국을 혼란에 빠뜨린 부류가 있다. 원간섭기에 왕권을 위협하면서 고려 정국을 주도했던 정치세력이자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1356년 공민왕의 반원개혁 운동으로 다수가 제거되었으며, 신흥무장 이성계와 신진사대부에 의해 축출되었다.
부원세력(附元勢力)은 몽골의 고려 침략에서 기원했다. 홍복원(洪福源)은 1233년(고종 20)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몽골로 도망쳐 그들의 앞잡이가 되었다. 그의 아들 홍다구(洪茶丘), 손자 홍중희(洪重喜) 등도 몽골에서 출세해 고려의 내정에 깊숙이 개입했다. 1258년(고종 45)에 몽골군이 동북면(東北面: 東界)을 대거 침략하자 조휘(趙暉)와 탁청(卓靑) 등이 그들을 끌어들여 이 지역을 점령하도록 도왔다. 몽골이 이 지역을 직접 지배하기 위해 화주(和州)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해 조휘를 총관(摠管)에, 탁청을 천호(千戶)에 임명했다.
고려가 몽골에 항복해 원간섭기(元干涉期)에 들어서자 원에 기댄 부원세력은 더욱 확대되었다. 이 시기에 몽골어 구사, 매 사육 등 실용적 능력으로 출세한 사람들을 친원파(親元派)라 비판한 반면 유학적 소양을 지닌 사족(士族)을 반원파(反元派)로 찬양한 연구경향이 있는데 이는 객관적이지 못하다. 원간섭기에는 지배층의 대부분이 친원적 성향을 띠었으므로 부원세력은 고려에 심각한 피해를 끼친 부류로 한정시킬 필요가 있다.
부원세력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첫째, 몽골의 고려 침략과 고려 영토 점령에 적극 협조한 부류가 있다. 둘째, 몽골 내지 원을 배경으로 고려 내정 간섭에 적극 협조해 고려의 정국을 혼란에 빠뜨린 부류가 있다. 홍복원 집안은 전자와 후자 모두에 해당한다. 쌍성총관부의 총관과 천호를 세습한 조휘와 탁청 집안은 물론 이성계(李成桂) 집안은 전자에 해당한다.
이성계의 고조 이안사(李安社: 穆祖), 증조 이행리(李行里: 翼祖), 조부 이춘(李椿: 度祖), 부친 이자춘(李子春: 桓祖)은 두만강 유역과 쌍성 지역의 천호와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세습했다. 젊은 시절의 이성계도 그러한 부친에 협력했으므로 부원세력에 포함시킬 수 있다. 단, 1356년(공민왕 5)원의 약화가 가시화되자 이자춘이 아들 이성계와 함께 공민왕에게 내조(來朝)하여 고려의 신하가 됨으로써 고려의 쌍성총관부 수복에 결정적 공헌을 하였다.
고려 왕실과 결혼한 몽골 공주와 그녀를 따라온 사속인(私屬人)인 겁령구(怯怜口)는 후자에 해당한다. 고려 국왕 원종은 대몽항쟁을 종식시키고 무신정권을 타도한 인물이었다. 반면, 충렬왕은 원나라 황제의 부마로서 원나라와의 관계에 충실했으며,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우두머리인 승상(丞相)으로서 부원세력으로 분류될 수 있다. 하지만 원종과 충렬왕이 고려국의 유지를 위해 애쓴 측면도 있어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함에도 충선왕은 원세조 쿠빌라이칸의 외손자라는 특별한 지위를 배경으로 세자, 국왕, 심양왕(瀋陽王: 瀋王), 상왕(上王) 시절에 고려의 정국을 혼돈에 빠뜨렸으므로 후자의 부원세력에 해당한다. 심양왕 왕고(王暠)가 원을 배경으로 고려 국왕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고려의 정국을 뒤흔들었으므로 그와 심왕파는 후자의 부원세력에 포함된다. 특히 충선왕은 조카 왕고에게 심양왕을 물려주었으므로 그러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원간섭기에 가장 심각한 문제는 원이 중국의 여러 지역에 성(省)을 설치해 직접 지배를 관철했듯이 고려국을 없애고 성을 설치해 직접 지배하려 했던 입성책동(立省策動)이었다. 이 책동의 주동자들은 당연히 전자의 부원세력에 해당한다.
한편, 원 황실에서 출세해 고려의 내정에 깊숙이 간섭한 부류이거나 그러한 인물을 배경으로 출세해 고려의 내정에 간섭한 부류도 부원세력이다. 원순제의 제2황후에 오른 기황후(奇皇后), 그녀를 등에 업고 권세를 부린 오빠 기철(奇轍) 등의 기씨 집안, 딸을 순제에게 바쳐 권세를 부린 노책(盧頙) 등의 노씨 집안, 딸을 황태자에게 바쳐 권세를 부린 권겸(權謙) 등의 권씨 집안, 원에 저항한 충혜왕을 원으로 납치하는데 협력한 환관(宦官) 고용보(高龍普)와 그의 처남 신예(辛裔) 등이 그러한 부류이다.
최유(崔濡)는 기황후의 사주로 공민왕을 폐위하고 고려 국왕으로 세운 덕흥군(德興君)을 앞세워 원의 군대 1만명을 이끌고 1364년(공민왕 13)에 고려를 침략했으므로 덕흥군과 더불어 부원세력에 해당한다. 부원세력의 전횡에 고심하던 공민왕은 1356년(공민왕 5) 반원개혁(反元改革)을 단행하면서 기철, 노책, 권겸 등의 부원세력을 제거했고, 최영은 최유와 덕흥군의 군대를 물리쳐 고려를 지켜냈다.
원간섭기에 원과 관련된 인물들을 친원파, 부원세력, 부원배(附元輩) 등으로 혼용해 왔는데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은 채 사용한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부원세력, 부원배는 친원파보다 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부원세력과 부원배로 한정시켜 보면, 부원배가 부원세력보다 좀 더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하다. 원간섭기에 고려 지배층은 거의 다 친원적이었으므로 친원파 내지 친원세력이라는 용어는 쓰지 않는 편이 자연스럽다.
다만, 부원세력이라는 용어는 원나라에 의존하여 고려 측에 피해를 주었던 정도의 범주를 정해 사용할 필요성이 있다. 부원세력은 원간섭기 왕권을 위협하면서 고려 정국을 주도했던 정치세력이자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들은 1356년 공민왕의 반원개혁 운동으로 다수가 제거되었으며, 이후 신흥무장 이성계와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에 의해 축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