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안사(李安社). 장군 이양무(李陽茂)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이씨(李氏)로 상장군 이강제(李康齊)의 딸이다. 비는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이숙(李肅)의 딸 효공왕후(孝恭王后: 추존) 이다. 1394년(태조 3) 태조가 4대조를 추존할 때, 덕을 베풀고 의로써 행했다 하여 목조로 추존하였다.
이성계의 가계가 역사상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은 1170년(의종 24) 경부터이다. 이 때 무신란을 주도한 이의방(李義方)의 동생 이린(李隣)이 이색(李穡)이 지은 이자춘신도비(李子春神道碑)에 나오는 이성계의 6대조로 보이므로, 전주 이씨 일족은 적어도 무신란 직전부터 무반직에 올라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뒤 1174년(명종 4) 이의방이 피살되자 이린은 낙향했는데, 손자 이안사에 이르러 역사적 인물로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전주의 토호였던 이안사가 전주를 떠나게 된 것은 관기를 둘러싸고 지주(知州: 知全州事) 및 산성별감(山城別監: 山城防護別監의 약칭)의 비위에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처벌을 받을 것을 눈치채고 이를 피해 가솔과 토착인 170여 호를 거느리고 삼척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삼척에 정착한 지 얼마 뒤, 이 곳에 부임한 안렴사(按廉使)가 공교롭게도 전주에서 다투었던 산성별감이었다. 이에 1253년(고종 40) 다시 일행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해 덕원부(德源府), 즉 의주(宜州)로 옮겼다.
이 때 휘하에는 전주에서부터 따라 온 170여 호뿐만 아니라 삼척과 덕원에서도 따르는 사람이 많아 큰 족단(族團)을 이루었다.
고려 정부는 이안사를 회유하기 위해 의주병마에 임명하고 고원(高原)을 지키게 하였다. 당시 의주(宜州)에서 북쪽으로 100여 리 되는 쌍성(쌍성: 지금의 永興)에 원(元)의 침략군 장수 산길(散吉)이 주둔하고 있었다.
1254년 산길은 이 곳에서 점차 세력이 확장되고 있는 이안사를 견제하기 위해 회유하여, 의주에서 개원로 난징[南京]의 오동[斡東]으로 옮기게 하고 오천호소(五千戶所)의 수천호(首千戶)로서 다루가치(達魯花赤)를 겸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안사는 고려의 관직을 버리고 투항해 원나라의 관직을 받은 셈이 되었다.
그 뒤 1258년에 동북면으로 침입하는 몽고군과 대항해 싸우던 동북면병마사 신집평(愼執平)이 무리한 입도 작전(入島作戰)으로 주민의 반감을 사서 곤경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중, 용진현인(龍津縣人) 조휘(趙暉)와 정주인(定州人) 탁청(卓靑)이 신집평을 살해한 뒤 몽고에 투항하였다.
몽고는 화주(和州)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조휘를 총관, 탁청을 천호(千戶)로 삼았다.
결국 이안사는 쌍성에서 고려를 배반한 조휘 · 탁청과 같은 무리가 되었다. 그 뒤 20여 년간 오동에 거주하면서 여진족까지 다스리다가 세력 기반을 아들 이행리(李行里)에게 넘겼다. 능호는 덕릉(德陵)으로 처음 경흥성(慶興城) 남쪽에 있었으나 1410년(태종 10) 함흥 서북쪽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