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4년(원종 15)에 설치되었다.
몽고가 처음 고려에 동녀를 요구한 것은 제1차 여 · 몽전쟁 때로 몽고의 장군 살리타이(撒禮塔)는 사자를 보내어 저고여(著古與)를 죽인 보상으로 수달피 · 말과 함께 왕족 · 대관자제 및 동남 · 동녀(童女) 각 천명을 몽고 황제에게 헌납하라고 한 데서 비롯된다. 이 때 고려는 나견능주(羅絹綾紬) · 금은주기(金銀鑄器) 등을 보내고 동남 · 동녀의 공납은 하지 않았다.
최씨무인정권이 무너진 뒤 고려는 1259년(고종 46) 태자 전(倎)을 몽고에 보내어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1271년(원종 12) 원나라 세조의 딸 제국공주(齊國公主)와 세자 심(諶 : 뒤의 충렬왕)을 약혼시키고 3년 뒤에 결혼시킴으로써 원나라의 고려지배정책은 한층 강화되었다. 이때 원나라는 다시 고려에 동녀를 요구하였다.
즉, 성혼 두달 전인 1274년 3월에 만자매빙사(蠻子媒聘使) 초욱(肖郁)을 고려에 보내어 남송의 양양부(襄陽府)에서 새로 편입한 군인을 위해 남편이 없는 부녀 140인을 제공할 것을 요구해왔다.
원나라는 납폐물(納幣物)로 비단 1,640단(段)을 보내고 매우 급박하게 독촉하므로 고려는 하는 수 없이 결혼도감을 설치해 반년 정도 걸려 겨우 그 수효를 채우게 되었다.
징발된 부녀들은 대부분이 민간의 독녀(獨女), 역적의 처, 파계한 승려의 딸들이었는데 한 사람당 비단 12필의 자장료(資粧料 : 화장값)를 지급하였다.
만자가 데리고 북으로 돌아갈 때, 곡성이 하늘을 진동하고 백성들의 원망은 형언하기 어려웠다 한다. 이때 끌려간 여자들은 비록 양가부녀는 아니었지만 이듬해 원나라가 다시 악탈연(岳脫衍) · 강수형(康守衡)을 보내 고려와 원나라 양국의 통혼을 위해 양가처녀를 요구하였다.
이는 이후 1355년(공민왕 4)까지 무려 80년에 걸친 공녀(貢女)의 비극을 낳게 한 기틀을 만든 계기가 되었다.→ 공녀(貢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