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유정난은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 세력이자 원로대신인 황보인·김종서 등 수십 인을 살해,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이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단종은 수렴청정을 할 대왕대비도 없어서 문종의 고명을 받은 황보인, 김종서 등 대신들이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단종 즉위 후부터 거사를 계획한 수양대군은 이러한 상황이 굳어져 가기 전인 1453년 김종서 등에게 모반죄를 씌워 제거하고 정권과 병권을 장악했으며, 자신을 포함하여 정난에 협력한 43인을 정난공신으로 책봉했다. 이로써 2년 뒤 강제로 단종의 선위를 받고 즉위할 기반을 마련하였다.
1452년 5월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자 단종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어린 임금이 즉위하면 가장 서열이 높은 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그러나 당시 여건은 수렴청정을 할 대왕대비가 없었다.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가 단종을 낳은 다음 날에 산욕열(産褥熱)로 죽었지만, 1441년(세종 23)에 문종은 다시 세자빈을 맞지 않았다. 후궁으로 귀인 홍씨(洪氏) · 양씨(楊氏)만을 두었던 것이다. 사실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惠嬪楊氏)가 있기는 했으나, 정치적 발언권이 없었다. 후궁들은 모두 비슷한 위치에서 다만 내사(內事)를 돕는 일에만 관여할 뿐이었다. 때문에 모든 정치적 권력은 문종의 유명을 받은 이른바 고명 대신(顧命大臣) 황보인(皇甫仁) · 김종서(金宗瑞) 등이 잡고 있었다.
세종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사이에 출생한 적자(嫡子)는 문종 외에도 수양(首陽) · 안평(安平) · 임영(臨瀛) · 광평(廣平) · 금성(錦城) · 평원(平原) · 영응(永膺)의 일곱 대군이 있었다. 당시 단종의 왕권은 정립되지 못한 상태였다. 때문에 능력있는 여러 대군은 왕권에 큰 위협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둘째인 수양대군과 셋째인 안평대군은 서로 세력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성격이 아주 달랐다. 수양대군은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주위에 문무에 뛰어난 문객을 많이 모았다. 반면에, 안평대군은 정치적인 관심보다는 문학 · 예술을 좋아해 이 방면의 동호인을 끌어들였다. 이에 수양대군은 처음부터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과 정치적으로 연결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단종 초 고명대신의 변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단종이 즉위할 때의 진용은 영의정에 황보인, 좌의정에 남지(南智), 우의정에 김종서였다. 이후 남지는 1452년(단종 즉위년) 10월 신병으로 사임하고 그 후임으로 같은 해 12월 김종서를 좌의정, 정분(鄭苯)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황보인은 성격이 유약하고 남지는 오래 전부터 앓아온 신병으로 정권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실권은 자연히 김종서가 장악하게 되었다. 정분이 우의정이 된 다음에도 계속해서 모든 권력은 김종서에게 기울었다.
『단종실록』은 이 대신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즉, 대신들이 안평대군 등 종친뿐 아니라 혜빈 양씨, 환관 등과 모의해 궁중에까지 세력을 부식하는 한편, 황표정사(黃標政事)라 불릴 정도로 자제를 포함, 많은 당여(黨與)를 요직에 배열해 붕당을 조성했으며 끝내는 종실을 뒤엎고 수양대군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음모를 꾸몄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단종실록』이 세조 때 어용 사관에 의해 편찬된 것임을 감안하면, 믿기 어려운 점이 많다. 또, 수양대군은 단종을 몰아내고 세조로 즉위한 다음, 『경국대전』 편찬 과정에서 제2의 창업지주(創業之主) 혹은 조종지주(祖宗之主)임을 내세웠다. 그는 계유정난이 없었다면, 황보인 · 김종서 등이 반드시 안평대군과 모의해 종사를 결딴내었을 것이라고 언명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수성지군(守成之君)이 아니라 창업주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경국대전』의 체재는 물론, 많은 신법을 제정한 것을 보아도 그의 야망이 어디에 있었던가를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황보인 · 김종서 등은 고명대신으로서 어린 단종을 끝까지 충성을 다해 보필하려고 했을 뿐, 야심을 품고 붕당을 조성하려 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이들 대신의 합의체인 의정부가 국왕을 보필하고 정사를 협의하는 최고 정무기관으로서의 본래 임무를 넘어섰던 것은 사실이다. 어떤 사관(史官)의 말을 인용하면 “왕은 손 하나 움직일 수 없는 괴뢰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백관은 의정부가 있는 것은 알았으나, 군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다.”고 할 정도로 왕권이 미약했던 것은 사실이다.
유교적 비전제정치를 내세워 재상중심 체제를 주장하던 정인지(鄭麟趾) · 최항(崔恒) · 신숙주(申叔舟) · 성삼문(成三問) · 하위지(河緯地) 등 집현전 출신의 유신도 황보인 · 김종서의 지나친 권력 증대에는 비판적이었다. 뒷날 수양대군이 황보인 · 김종서 등을 제거할 때, 많은 집현전 출신 관료가 수양대군에 동조하거나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 것도 이 때문이다. 수양대군도 이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이들이 세력을 더 굳히기 전에 제거할 계획을 추진했던 것이다.
그런데 만일 수양대군의 생각처럼 황보인 · 김종서 등이 대군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했다면, 수양대군이 고명 사은사(誥命謝恩使)로 명나라에 가는 기회를 이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이 기회를 이용할 것이라고 생각한 문객 권람(權擥)은 수양이 사신으로 가는 것을 간곡히 만류하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웃으며 황보인 · 김종서는 호걸이 아니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고명대신들은 수양대군의 행동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수양대군이 거사를 계획한 시기는 단종 즉위 후 2개월이 지난 1452년(단종 즉위) 7월경으로 예상된다. 이때 권람이 방문하자, 수양대군은 정계의 움직임에 대해 진심을 털어놓았다. 또한, 이때부터 수양대군은 대권에 야심을 품고서 권람 · 홍윤성(洪允成) · 한명회(韓明澮) 등을 심복으로 만들었다. 수양대군의 거사 계획은 그가 1453년 4월 명나라에서 돌아오면서 급진전되었다. 신숙주를 막하에 끌어들이는 한편, 홍달손(洪達孫) · 양정(楊汀) 등의 심복 무사를 양성해 거사 준비를 착착 진행하였다. 같은 해 10월 10일 밤, 마침내 유숙(柳淑) · 양정 · 어을운(於乙云) 등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가 간계를 써서 철퇴로 쓰러뜨렸다. 그리고 황보인 · 조극관(趙克寬) · 이양(李穰) 등 여러 대신을 왕명으로 밀소(密召)하여 궁문에서 퇴살(推殺)하였다.
안평대군은 강화도에 안치했다가 사사(賜死)하였다. 정분 · 조수량(趙遂良) · 안완경(安完慶) 등은 귀양보냈다가 곧 교살하였다. 이와 같이, 김종서 등에게 모반죄를 씌워 무참하게 죽인 것은 수양대군 일파가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함길도 절도사로 있던 이징옥(李澄玉)도 김종서의 일당이라고 하여 파면하고, 그 후임에 박호문(朴好問)을 임명하였다. 이에 이징옥이 분개하여 박호문을 죽인 다음, 휘하 군사를 이끌고 종성을 근거지로 하여 저항하였다( 이징옥의 난). 그는 대금황제라 칭하면서 기세를 올리기도 했으나, 종성부사 정종(鄭種)의 반간계(反間計)에 걸려 잡혀 죽었다.
무단적인 방법으로 정적을 숙청한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부사 · 영집현전사 · 영경연사 · 영춘추관사 · 영서운관사 · 겸판이병조 · 내외병마도통사 등 여러 중직을 겸하는 등 정권과 병권을 독차지하였다. 그리고 거사에 직접 · 간접으로 공을 세운 정인지 · 권람 · 한명회 · 양정 등 43인(수양대군 포함)을 정난공신으로 책봉하였다. 이로써, 수양대군은 2년 뒤에 강제로 단종의 선위(禪位)를 받아 세조로 즉위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