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양주(楊州). 조인필(趙仁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의(趙誼)이고, 아버지는 조계생(趙啓生)이며, 조말생(趙末生)의 조카이다.
1414년(태종 14) 알성문과에 을과 3등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에 등용되고, 1418년 정자(正字)에 승진하여 서연(書筵)에 나가 세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을 보필하던 중, 이 해 세자의 난행(亂行)을 막지 못한 죄로 파직되었다.
그 뒤 1420년 (세종 2) 다시 우정언이 되고 지평(持平)을 거쳐 1426년 이조정랑이 되었다. 1427년 진하사(進賀使)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사헌부장령(司憲府將令)을 거쳐 1437년 지형조사(知刑曹事)가 되었고, 1441년 형조참의를 거쳐 우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공조참판을 지내고 1443년 평안도도관찰사가 되었다. 1446년 병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이조참판이 되었으며, 그 해 8월 황해도도체찰사가 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아 전라도 용안현(龍安縣)에 부처되었다.
1449년 다시 예조참판에 기용되었고, 이 해 9월 요동지휘사(遼東指揮使) 왕무귀(王武貴)가 명제(明帝)의 조칙을 가지고 왔을 때 왕이 병으로 마중을 나가지 못하자, 왕을 대신해서 칙사를 맞이하였다.
그 해 10월 형조판서에 올랐고, 12월 함길도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때 마침 침입해 온 야인들을 물리쳐 전공을 세웠고, 1451년(문종 1) 그 공으로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었을 때 함경도 일대에 축성을 해야만 국가의 이익이 된다는 것을 상계하여 성곽을 보수 또는 신축하고, 군사의 훈련제도를 강화하는 등 국방 경비에 힘을 기울였다.
이 해 7월 형조판서와 대사헌을 거쳐 곧 병조판서가 되었다가, 얼마 뒤 우찬성이 되었다. 1453년 이조판서가 되었지만,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에 김종서(金宗瑞)의 일파로 몰려 피살되었다. 영조 때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