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성군 ()

대동여지도 중 함경북도 종성 부분
대동여지도 중 함경북도 종성 부분
인문지리
지명
함경북도 북단에 있는 군.
정의
함경북도 북단에 있는 군.
개관

동쪽은 경원군, 서쪽은 두만강을 경계로 중국 동북 지방, 남쪽은 회령군·경흥군·나진시, 북쪽은 온성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9°44′∼130°15′, 북위 42°17′∼42°53′에 위치하며, 면적 1,122.69㎢, 인구 3만7953명(1944년 현재)이다. 6개 면 31개 동으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종성면 주산동이다.

자연환경

이 군은 함경산맥이 횡단하고 있어 낮고 평평한 평야는 거의 없고 대부분 산악 지대를 이룬다. 고연두산(高煙頭山, 841m)·방원령(防垣嶺, 948m)·굴산(屈山, 992m) 등의 산지가 솟아 있고, 서풍천(西豊川)·동관천(潼關川)·오룡천(五龍川) 등의 하천은 북류하여 두만강으로 유입한다.

행영면에서 동류하는 오룡천과 화방면에서 북류하는 방산천(方山川)은 용계면에서 합류하여 경원군을 거쳐 두만강으로 유입하는데, 이들 하천이 합류하는 봉산동과 박이산동 일대는 군내에서 가장 넓은 분지를 이룬다.

지질은 평안계의 홍점통(紅店統)과 제3기층으로 되어 있으며, 일부 지역에 중생대의 화강암이 점재(點在)한다. 토양은 부식의 함량이 많은 양토질로서 비교적 비옥하다.

우리 나라의 최고위도 지방에 위치하고 있어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며, 연 평균 기온 5℃, 1월 평균 기온 -13.4℃, 8월 평균 기온 22. 9℃, 연 강수량 508.7㎜이다. 서리는 9월 하순부터 시작하여 이듬해 4월 말경까지 내린다.

역사

[고대]

종성면 동관진(潼關鎭)의 두만강변에서는 지구 상에서 이미 전멸된 것으로 알려진 포유동물의 화석과 흑요석편, 그리고 거록의 뿔, 골각기 등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으므로 이곳에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이 확실하다.

《사기》에 따르면, 상고 시대에 이 지방에는 숙신(肅愼)·읍루(挹婁)·예맥(濊貊)·옥저(沃沮)·말갈(靺鞨)·부여(夫餘) 등 부족 국가의 흥망성쇠가 있었다고 하며,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의 영역이었다.

668년(문무왕 8)에 신라가 당(唐)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가 그 땅을 점령하였을 무렵에는 한때 그 군정 아래 있었고, 699년(효소왕 8)에 고구려 유민들이 이 땅에 발해를 세웠을 때는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에 속하여 있었다.

[고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초기 영역은 통일 신라 시대의 판도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발해와 북계를 이루었다. 926년(태조 9)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이후 수세기에 걸쳐 이 지방은 여러 이민족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리고 발해가 무너질 때 이에서 벗어난 일부 말갈족인 여진(女眞)은 약 1세기 동안 금(金)나라를 유지하다가 원(元)나라에게 무너지자 백두산 후면에 살았으나 그 일부는 차차 남으로 이동하여 함흥 지방에서 고려와 대치하여 자주 충돌하였다.

그러다가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일어설 무렵인 공민왕 말엽에 함경산맥 동측의 동해 방면을 따라 두만강 최하류 지방까지 고려가 수복하여 이 일대를 동북면(東北面)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

1398년(태조 7) 두만강 하구 지방에 경원부(慶源府)를 설치하였으나 당시 이 지역은 여진족의 세력 범위에 있었다.

세종 때 김종서(金宗瑞)의 육진 개척 사업이 궤도에 올라 1434년(세종 16) 부거(富居)에 있던 영북진(寧北鎭)을 백안수소(伯顔愁所: 行營)에 옮겨 본진으로 삼았고, 다음해에 군을 두어 종성(鍾城)이라 이름을 지었으며, 진의 절제사(節制使)로 하여금 지군사(知郡事)를 겸하게 하였다.

1440년에는 지난날 수주(愁州)라 불리던 지금의 종성면으로 치소를 옮겼으며, 이듬해 남방으로부터 민호를 이주하게 하여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1443년에는 야인(野人)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회령·경원 사이의 두만강안을 따라 축조하던 행성(行城) 중 이 군 관내 15만 1,590척 길이의 성을 완성하였다.

1453년(단종 1)에는 함길도도절제사였던 이징옥(李澄玉)이 경원에서 반란을 일으켜 대금황제(大金皇帝)를 자칭하면서 오국산성에 도읍차 이곳에 이르자 부사(府使) 정종(鄭種)이 그를 주살하여 난을 평정하였다.

[근대]

1895년 행정 구역 개편 때 경성부 종성군이 되었다가 이듬해함경북도 종성군이 되었다. 1937년 고읍면이 행영면으로 고쳐졌다.

1927년 상삼봉(上三峰)에서 분기되는 국제 철도가 부설되어 대륙의 관문으로서 농산물의 집산지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1945년 당시에는 6개 면 31개 동리에 호구는 7,173호 3만7953명에 이르렀다.

근대 인물로는 1894년 청나라 사신 위안스카이(袁世凱)의 통역관으로 있다가 간도로 이주하여 수많은 망명 독립지사들을 자택에 기숙하게 하였으며, 우리 나라 교포의 토지를 몰수하는 중국 법령이 공포되자 총통 위안스카이를 방문하여 간민의 토지 소유권을 합법화하는 등 독립 운동과 교포 보호에 크게 공헌한 이동춘(李同春), 1899년 간도로 이주하여 간민교육회 회장으로 교육 사업에 헌신하였고, 독립 운동 단체의 연합전선에 노력하는 등 교포 지도자였던 김약연(金躍淵)목사, 대한국민회 독립군사령관으로 무력항쟁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사망한 안무(安武, 安秉鎬), 독립군 무기 구입을 위한 간도15만원사건의 3의사 중 한 사람으로 사형된 한상호(韓相浩) 등이 있다.

유물ㆍ유적

이 군내에는 종성읍성(鍾城邑城)을 비롯하여 수항루(受降樓)·진서루(鎭西樓)·공신루(拱辰樓)·기허루(倚虛樓)·척금루(滌襟樓)·제승루(制勝樓)·진북루(鎭北樓) 등의 유서 깊은 누문(樓門)이 남아 있다.

관북 지방의 호적(胡敵)을 막던 국방의 일선으로서 동관진을 비롯하여 행영(行營)·동건산성(童巾山城), 남산면 방원동의 방원보(防垣堡)와 세천동의 세천보(細川堡), 풍곡면 운암동의 응곡보(鷹谷堡), 관산동의 서풍보(西豐堡), 풍계동의 동풍보(東豐堡) 및 종성면 산성동에는 육진의 하나인 종성보(鍾城堡) 등이 있고, 누대로는 망후대(望候臺)가 있다.

사찰로는 종성면 금산동에 곡천사(谷泉寺)와 용계면에 백련사(白蓮寺)가 있으며, 풍곡면 풍계동에 영봉사(靈峰寺)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에서 최초로 구석기 시대 유물을 수집하였던 동관진의 석기 산포 지역을 비롯하여 남산면 삼봉동과 방원동의 신석기 산포 지역, 용계면 봉산동의 석기 산포 지역 등이 있으며, 풍곡면 풍천동고분, 용계면 종산동고분, 화방면 녹야동고분 등이 여러 곳에 분포되어 있다.

교육ㆍ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1441년(세종 23) 종성면 주산동에 종성향교(鍾城鄕校)가 건립되었다. 1498년(연산군 4) 정여창(鄭汝昌)이 유배된 이래 몇몇 문신들이 귀양을 왔고, 1653년(효종 4) 조석윤(趙錫胤)이 부사로 부임하는 등 많은 학자들이 중앙으로부터 내려옴에 따라 각처에 서실(書室)이 세워졌다.

이의 영향을 받아 1667년(현종 8) 용계면 부계동에 사액서원인 종성서원(鍾城書院)이 건립되어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후학 양성에 크게 공헌한 한세양(韓世襄)·한몽린(韓夢麟)·한여두(韓汝斗)·남명학(南溟學)·한몽필(韓夢弼) 등은 1817년(순조 17) 서원동희성사(希聖祠, 일명 七賢祠)에 배향되었다.

근대식 교육 기관으로는 1909년에 설립된 종성공립보통학교가 최초이다. 곧이어 용계면에 원동학교(院洞學校)와 향동학교(香洞學校)가 설립되고, 화방면에 화산학교(華山學校)가 세워졌다.

1918년 행영공영보통학교가 설립되어 1면 1교의 교육 체제를 갖추었으며, 1945년 현재 유치원 2개, 초등학교 13개교가 있다. 불교 사찰로는 종성면에 곡천사가 있고, 장로교회 3개가 있다.

이 고장의 설화로는 종성면 동관동에 있는 3층 누각인 수항루에 얽힌 〈수항루전설〉이 있다. 본래 이름은 뇌천각(雷天閣)이었는데, 이것을 수항루로 부르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예로부터 두만강 동북 지방의 간도 지방에는 여진족이 살아서 육진 개척 후에도 자주 우리 변방에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므로 이곳 백성들은 안도할 날이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에 김사주(金嗣朱)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지모와 무예가 출중하여 임진왜란 때에는 겸사복(兼司僕)으로 의병에 자원 출진하여 큰 공을 세웠고, 전란이 끝난 뒤 계속 변방 수호의 소임을 맡아 월경자를 모조리 체포하여 뇌천각에서 항복을 받았으며, 그가 뇌천각에 올라 군사 조련을 하게 되면 우뢰와 같은 호령과 검광이 강 건너까지 위압해 그가 있는 한 호족이 감히 넘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 어느 날 호적 300여 명이 대안에 집결하여 면내를 습격할 태세에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는데, 이쪽 수비병은 100여 명에 불과하여 중과부적으로 꼼짝 못하고 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처하였다.

이에 부사 임유후(任有後)는 계략으로 일부 병력을 배치하고 한편으로는 적의 눈을 피하여 수십 명씩 동문을 빠져 오봉골을 돌아 금산을 거쳐 성내에 다시 들어오도록 여러 차례 반복하여 많은 원병이 입성하는 것처럼 위장하였다.

호적들은 속아 의기소침한 가운데 멀리 오지로 퇴각하여 버려 싸우지 않고 적을 항복시킴과 다름없었다. 이러한 사실로 하여 효종 말년에 누각을 중수함과 동시에 그 이름을 수항루로 고쳤다.

그런데 그 뒤 오랑캐가 청나라를 이룩한 다음에도 이 누각을 수항루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는 자기들의 치욕의 역사를 새기는 것 같아서 조정에서도 하는 수 없이 비슷한 발음으로 수왕루(守旺樓)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 지방은 한반도 최북단의 두만강변에 있어서 다른 지방과 더불어 그 역사적 또는 지리적 환경 때문에 토속적인 뿌리 깊은 민요는 없고 근대요가 전하여지고 있다.

〈애원성〉은 다음과 같다. “술 취한 강산에 호걸이 춤추고 돈 없는 천지엔 영웅도 우노나/(후렴) 에─얼싸 좋다 얼널덜 더리고 상사디야/세월아 네월아 네가 가지를 말아라 작난한 호걸이 다 늙어 간다/쌀쌀한 보름에 달빛은 밝아도 그리는 마음은 언제가 오늘이라/간다 간다 나는 돌아를 간다/간다 해두 아주 갈까 정은 두고 간다/(후렴) 에헤야 에헤야 아무리 보아도 널과 내로다 네헤야 에헤야.” 이 밖에도 다른 지방에서도 널리 불리는 농요가 전한다.

이 지방의 민속놀이로는 사자놀이·석전놀이·활쏘기·횃불싸움 등이 성행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자취를 감추고 다만 세시풍속 윷놀이가 활발하다. 윷가락은 강낭콩에 금을 새긴 것을 사용하며, 기후 관계로 실내에서만 놀이를 한다.

부녀자들은 보름날 달맞이 윷점으로 당년 운수를 가리며, 청소년들은 연날리기·얼음타기·팽이치기 등을 즐긴다. 단오에는 씨름·그네뛰기·널뛰기 등이 성행하나 추석에는 명절 분위기가 덜하다.

동제로는 오랜 민간 신앙으로 산천제가 대표적이다. 산천제는 음력 3월이나 10월 중에 마을단위로 행하며, 치제의 목적은 산천신이 가호하여 마을에 맹수가 드나들어 사람과 가축을 살상하거나 괴질이 유행하여 민심을 흉흉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함이다.

제단은 마을내에 정결한 곳을 정하여 임시로 마련하며, 제수는 미리 선정한 집에서 여러 명이 맡은 바 임무에 따라 이를 준비하고, 제관은 며칠 전부터 몸을 정결히 한다.

제수로는 돼지머리와 시루떡·감주·백미·백포·백지 등을 준비하여 제단 중앙에 ‘산천지신위’라고 쓴 신주 앞에 진설하고 각 집에서는 메 한 그릇씩을 올린다. 의식은 3명의 제관이 분향, 헌작, 배례한 다음 고축하고 그 자리에서 음복과 회식이 있고 고기는 집집마다 나누어 먹는다.

산업ㆍ교통

이 군은 대부분의 지역이 산지로 되어 있어, 1935년 현재 경지 면적이 150㎢이며, 논의 비율은 2% 이하이다. 따라서, 조·기장·보리·밀·수수·감자·콩 등의 잡곡이 주산물이며, 가축으로는 소·면양·돼지 등을 사육하고, 산에서는 송이·약초 등의 임산물을 채취한다. 면양은 광복 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도입하여 행영분지(行營盆地)를 중심으로 많이 사육하였다.

또한, 군내에는 삼림자원이 풍부하여 원목의 집산지인 상삼봉·종성면 등지에 제재소와 펄프 공장이 있다. 특산물로는 이곳에서 생산된 벼룻돌[硯石]이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지하자원으로는 갈탄과 무연탄이 세천(細川) 부근에서 생산되며, 납과 흑연도 다소 산출된다.

이 군은 17세기 후반 회령과 경원에 청시(淸市)가 개시된 이래 교역 물자 수송의 거점으로서, 읍내에는 통관실(通官室)·두호실(頭胡室)·교역실(交易室)·차수실(差需室) 등의 호관(胡館)을 건축하여 국경 무역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근년에는 상삼봉과 대안의 개산둔(開山屯) 사이에 국제 철도(321m)가 부설되고, 1927년에 간도를 연결하는 천도철도(天圖鐵道)가 개통됨에 따라 한만(韓滿) 국경의 곡류 집산지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에 두만강 하류 연변을 따라 회령과 나진 사이의 북선선(北鮮線)이 개통되고, 인접한 온성군내의 남양(南陽)과 훈융(訓戎)에 중국동간도를 잇는 국제 철도가 부설됨에 따라 지방 시장으로 전락하였다.

이 시장에서는 일반 잡곡과 해산물·가축·생필품 등이 많이 거래되고 있다. 이 밖에 5일장인 종성면장은 우시장이 번창하며,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한 행영장은 가축의 매매와 벼루·북세포(北細布)·목기(木器)·약재·산채 등의 거래가 활발하다.

교통은 함경선이 두만강 연안을 따라 상삼봉에서 간도의 용정(龍井)으로 통하는 철도와 연결되며, 종성과 남양을 이어 주는 북선선과도 연결된다. 도로는 행영을 중심으로 회령·아오지·온성·경흥 등 네 방면으로 통하는 국도와 두만강 연안의 회령·상삼봉·종성을 거쳐 온성에 이르는 도로가 발달되어 있다.

읍ㆍ면

[남산면 南山面]

군의 서부에 있는 면. 면적 144.02㎢, 인구 6,235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삼봉동이다. 남서부 경계에 세계봉(世界峰, 745m)이 있으나 기타 지역은 낮은 구릉지로 되어 있다.

서쪽 두만강 연안에는 좁은 평지가 있어 이 강을 따라 북선선과 강변도로가 있다. 남쪽 경계에서 상삼봉에 이르는 두만강은 심한 감입 곡류를 하며, 강변 일대는 농경에 적합하여 쌀·조·피·수수·기장·옥수수·보리·콩·팥·녹두·감자 등이 많이 생산된다. 소·면양·돼지·닭 등이 사육되고, 부업으로는 양잠과 삼베직조를 한다.

삼봉동은 국방상 국내외 교통의 요충지로, 1927년 대안의 개산둔 사이에 국제 철교가 가설되고 천도철도가 개통됨에 따라 간도를 연결하는 교통 및 물자 교역의 국제 통로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고, 특히 한·중 국경 지방의 곡물 집산지로 유명해졌다. 삼봉동에는 연대평산성이 있다. 교육 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삼봉(三峰)·방원(防垣)·세천(細川) 등 3개 동이 있다.

[용계면 龍溪面]

군의 중앙 동부에 있는 면. 면적 251.73㎢, 인구 5,877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부계동이다. 동쪽에는 증산산맥(甑山山脈)이 남으로 뻗어 나단산(羅端山)이 솟아 있고, 사면이 낮은 구릉으로 둘러싸인 분지상을 이룬다.

경흥·회령·종성에서 모여든 하천이 남부에서 오룡천으로 합류하여 동류하며, 하천 연변에는 넓은 농경지가 발달하였다. 농산물로는 쌀·조·피·보리·기장·수수·옥수수·콩·팥·녹두·감자 등이 많이 생산되며, 소·면양·돼지·닭 등의 가축도 사육된다. 부업으로는 양잠과 삼베 직조를 한다. 특산물로는 벼루·연갑(硯匣)·연적 등의 세공품이 유명하다.

부계동에는 종성서원이 있으며, 그 옆에는 임진왜란 때의 창의공신(倡義功臣)과 이괄(李适)의 난 때 무공을 세운 공신들을 배향하는 창의사(彰義祠)가 있다.

서원동에 희성사가 있다. 교육 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부계(涪溪)·연산(硯山)·봉산(鳳山)·종산(鍾山)·서원(書院)·임천(林泉) 등 6개 동이 있다.

[종성면 鍾城面]

군의 북단에 있는 면. 면적 71.82㎢, 인구 8,732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주산동이다. 동쪽에는 낮은 구릉이 가로놓여 있으며, 두만강 연안의 좁은 평지를 따라 북선선과 강변도로가 건설되어 있다.

서풍천과 동관천이 서류하여 북부 지역을 지나 두만강으로 유입한다. 농산물로는 쌀·조·피·기장·보리·수수·옥수수·콩·팥·원두·녹두·감자 등이 많이 생산되며, 소도 많이 사육되고 있다.

국방상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이 면은 조선 초까지 수주라고 불렸고, 세종 때 김종서가 육진을 개척하고 읍성을 쌓았으나 지금은 수항루만 남아 있다. 동관동에는 수항루와 동관진의 옛 성터가 남아 있다.

이 밖에도 두만강 연변의 사면에는 멸종된 포유동물의 화석과 흑요석으로 된 세석기(細石器), 녹각(鹿角), 골각기 등의 구석기 유물이 발굴되어 중요한 유적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교육 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교가 있다. 주산(周山)·금산(錦山)·동관(潼關)·산성(山城)·청강(淸江) 등 5개 동이 있다.

[풍곡면 豐谷面]

군의 동북부에 있는 면. 면적 210.78㎢, 인구 7,128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풍계동이다. 동쪽 경계에 증산(甑山, 1,041m)이 솟아 있고 사방에 구릉이 발달하여 남고북저의 지세를 이룬다. 소백산에서 발원한 서풍천은 중앙을 동남에서 서북으로 흘러 들어가며 종성면 부근에서 두만강으로 유입한다.

서풍천 하류에는 좁은 평야지가 형성되어 쌀이 생산되며, 기타 지역에서는 조·피·보리·수수·기장·옥수수·콩·팥·원두·녹두·감자 등이 많이 생산된다.

특히 이곳에서 생산되는 콩은 그 품질이 우수하여 수출용으로도 호평을 받는다. 면내에는 초지가 많고 잡곡 생산에 의한 농후 사료(濃厚飼料)가 풍부하여 소·면양·돼지·닭 등이 많이 사육된다.

이곳에서 사육되는 소는 체격이 크고 강건하며 번식률이 높은 북선소[北鮮牛]이고, 면양은 오스트레일리아산 코리데일·메리노 종이다. 부업으로는 양잠과 삼베 직조를 하며, 특히 세포(細布)는 품질이 우수하기로 유명하다.

동쪽 산지에는 박달나무·자작나무·비솔나무·사시나무·물박달나무·버드나무 등의 활엽수림이 울창하여, 화전민과 재가승들이 목탄 제조와 산채 채취를 주업으로 한다. 교육 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풍계(豐溪)·풍천(豐川)·관산(舘山)·운암(雲巖)·운봉(雲峰)·동포(東浦) 등 6개 동이 있다.

[행영면 行營面]

군의 중앙 서부에 있는 면. 면적 152.53㎢, 인구 6,758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행영동이다. 본래 고읍면이었으나 1937년 행영면으로 개칭되었다.

면의 동쪽 경계에 광덕산(廣德山, 841m)이 솟아 있으나 사방이 낮은 구릉지로 둘러싸인 분지상을 이룬다. 행영천(行營川)은 서남쪽 경계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며 용계면에서 오룡천에 유입한다.

농산물은 쌀·조·보리·피·기장·수수·옥수수·콩·원두·감자 등이 많이 생산된다. 특히 관북 지방 특유의 우량종으로 알려진 외안콩은 이곳의 독농가(篤農家)가 원종(原種)을 발견하여 보급시킨 것으로, 품질이 뛰어나 수출용 농산물로도 유명하다. 축산물로는 소·면양·돼지·닭 등이 많이 사육되며, 부업으로는 양잠과 삼베 직조를 한다.

면내의 지경(地境)마을은 신석기 시대의 주거지와 유물이 발굴되어 사적지로 잘 알려져 있다. 교육 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행영(行營)·수(壽)·굴산(屈山)·중봉(仲峰)·용산(龍山)·낙생(洛生) 등 6개 동이 있다.

[화방면 華方面]

군의 남부에 있는 면. 면적 291.81㎢, 인구 3,223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녹야동이다. 동쪽에는 송진산(松眞山, 1,146m)이 솟아 있고, 동북쪽에는 증산산맥이 경원군과의 경계를 이룬다.

동남쪽에는 보로지봉이 높이 솟아 무산령산맥(茂山嶺山脈)과 이어지고, 서남쪽으로 산봉들의 여맥이 미쳐 산간벽지를 이룬다. 보로지봉에서 발원한 방산천이 북서류하다가 금송에서 유로의 방향을 바꾸어 용계면으로 북류한다.

농산물로는 조·보리·귀리·기장·수수·옥수수·메밀·콩·녹두 등의 생산량이 많고, 소가 많이 사육되며, 부업으로는 양잠과 양봉을 한다. 산지에는 소나무·이깔나무·박달나무·자작나무·사시나무·비솔나무·버드나무 등의 혼효림이 무성하여 목탄과 땔감으로 많이 쓰이며, 송이버섯 등의 임산물도 풍부하다.

심산 오지에는 화전민이 살고 있으며, 육진 개척 당시 귀화한 여진족의 후예인 재가승들이 산중에 집단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이 면은 동해안의 두만강 하구 지방과 내륙의 국경 지역을 잇는 중앙 지점에 위치하므로 교통의 요지를 이룬다. 교육 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녹야(鹿野)·유성(柳城)·사탄(沙灘)·화운(化雲)·금송(金松) 등 5개 동이 있다.

광복 후 변천

1952년 12월 종성면 주산리와 금산리의 일부로 이루어졌으며, 1954년 10월 온성군의 영강리를 편입하고, 1958년 6월 일부가 경원군으로 이관되었다.

1974년 5월 종성읍·산성노동자구·삼봉노동자구·강안리·영강리·풍계리·풍천리·동포리·하삭봉리·창평리가 온성군에 편입되고, 굴산리 등의 다른 일부 지역은 회령군으로 편입되면서 군이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종성읍지(鍾城邑誌)』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북한문화재 실태와 현황』(문화재관리국, 1985)
『함경북도지』(함경북도지편찬위원회, 1970)
『함북대관』(김성덕, 정문사, 1967)
집필자
조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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