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遺命)·유훈(遺訓)·유조(遺詔)·유고(遺誥)·유교(遺敎)’라고도 하였다. 보통 후계 문제·장례 절차·선정 당부(善政當付) 등을 그 내용으로 하였다.
고명을 받은 신하를 ‘고명대신’ 혹은 ‘고명지신(顧命之臣)’이라 하여 존중하였다. 고명은 구두로 전하기도 하고 유조(遺詔)나 유교(遺敎)와 같이 문서화하기도 하였다. 기원은 주나라의 성왕(成王)이 임종시에 군신들을 불러 강왕(康王)의 보호와 선정의 시행을 당부한 것에서 비롯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구려의 동명왕이 서기전 19년 처음으로 유리왕에게 “도(道)로써 다스림을 일으키라.”는 고명을 남긴 사실이 광개토대왕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신라에서는 유리이사금·문무왕·선덕왕·문성왕·헌안왕의 고명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특히, 문무왕의 유조는 명문으로서, 자신의 치적에 대한 평가, 죽음에 대한 달관, 태자에게 준 당부, 장례의 간소화, 부세(賦稅)의 경감, 율령의 개정 문제 등을 자세히 부탁했고, 장례 절차(화장 및 대왕암 안장)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였다. 이는 격식을 갖춘 고명의 전형적인 예가 되었다.
동명왕 외 고구려와 백제왕들의 고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고려에서는 태조 왕건(王建)을 비롯, 몽고족 침입 이전까지 대부분의 왕들이 유창한 장문의 유조를 남기고 있다. 아마도 형식화한 하나의 관례로 생각된다. 대개 죽음에 임하는 태도, 후계자의 지명과 그에 대한 훈계, 신하들에 대한 부탁의 말들이 주 내용을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의 왕들은 고명을 남기는 일이 드물었다. 세조·인종·영조·정조만이 후계 문제에 대해 간단히 언급했을 뿐이다. 다만, 세종은 만년에 대신들과 집현전 학사들에게 후사를 부탁한 적이 있는데, 이것도 고명의 일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명은 당사자의 인격과 그 시대의 정치 사상을 반영하고 있고, 때로는 당시의 현안 문제를 언급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