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은 명·청 시기 국내 관원 임명 및 외국 국왕의 책봉에 사용된 문서이다. 전근대 중국에서 사용한 황제 명령 문서의 하나로, 명대 이후 중국 왕조는 조선 등 외국 국왕을 책봉할 때 고명을 지급하였다. 한반도 왕조에 처음으로 발급된 고명은 명 홍무제(洪武帝)가 1370년 공민왕에게 인장(印章)과 함께 발송한 것이다. 이후 1423년 세자 책봉을 승인 받은 이후 세자가 고명의 대상에 포함되었고, 1451년 현덕왕후 책봉을 계기로 고명의 범위가 더욱 확대되었다. 조선이 받은 고명 중 현전하는 것은 조선 후기 연잉군(延?君) 세제(世弟) 책봉 고명 등 세 건이다.
전근대 중국에서 사용한 황제 명령 문서의 하나로, 명 · 청 시기 관직 임명 및 봉증(封贈)에 사용되었으며 조선 국왕과 같은 외국의 국왕을 책봉할 때 이용되었다.
‘고(誥)’의 존재는 서주(西周) 시기부터 나타난다. 『상서(尙書)』 등의 경전에서는 일반 백성 또는 제후에게 특정 내용을 알리는 행위로 고를 사용하였다. 송대(宋代)에는 관직 임명, 대신의 추증(追贈), 처벌 명령 등에 이용하였고, 명대(明代)에 이르면 1~5품 관원 임명 및 관원의 선대(先代) · 처(妻)의 봉증 문서로서 고명의 사용 범위가 명확해진다. 청 또한 명의 고명 제도를 대체로 계승하였다.
고명은 비단으로 만들어졌으며 바탕색에 따라 몇 개의 단으로 나눠진다. 고명의 표지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奉天誥命(봉천고명)”이라는 글자를 직조하였으며, 제1단 부분은 “奉天承運皇帝制曰(봉천승운황제제왈)”로 시작한다. 고명은 지급 대상의 품급에 따라 축(軸) 및 문구(文句)의 숫자가 정해져 있고, 제고지보(制誥之寶)를 안보하였다.
명대 이후 중국 왕조는 조선 등 외국 국왕을 책봉할 때 고명을 지급하였다. 통상적으로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 속에서 외국 국왕에 대한 승인을 책봉이라고 표현하지만, 명대 이후 ‘책(冊)’은 중국 황실의 황후, 태자 등에게만 지급되었고 외국 국왕을 책봉할 때는 고명을 발급하였다. 『대명회전』, 『대청회전』 등 명 · 청의 주요 법전에서는 외국 국왕에 대한 책봉을 ‘칙봉(勅封)’ 항목에 수록하였다. 따라서 고명이 책의 역할을 대신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 왕조에 발급된 고명은 명 홍무제(洪武帝)가 1370년(공민왕 19) 공민왕에게 인장(印章)과 함께 발송한 것이 첫 사례이다. 이후 원 · 명 교체에 따른 국제관계의 혼란과 이에 대한 한반도 왕조와의 갈등으로 인해 창왕, 공양왕, 조선의 태조는 모두 고명을 받지 못하였다. 태종대 ‘정난(靖難)의 변’으로 인해 건문제(建文帝)와 연왕(燕王, 이후 영락제)이 대립하는 틈을 타 책봉을 신청하여 승인받았고, 이후 조선 전기의 국왕들은 모두 고명을 수령하였다.
1637년(인조 15) 병자호란의 패전 결과, 조선은 명을 대신해 청으로부터 책봉을 받았다. 청은 즉시 명으로부터 받은 고명과 인장을 반납하도록 하고, 같은 해 11월에 인조를 국왕으로 인정하는 고명을 지급하였다. 이후 1863년에 즉위한 고종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 동안 조선 국왕은 청으로부터 고명을 받았다.
공민왕부터 조선 건국 직후까지 고명의 지급 대상은 국왕으로 한정되었다. 1423년(세종 5) 세자(이후 문종)에 대한 책봉을 승인받은 이후부터 세자가 고명의 대상에 포함되었고, 1451년(문종 1)에는 현덕왕후가 책봉되면서 고명을 받았다. 이로써 국왕, 왕비, 세자가 모두 고명의 지급 대상이 되었고, 이와 같은 관행은 청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고명 전달 방식은 명과 청이 약간 달랐다. 외국 국왕 책봉의 경우, 명 · 청 모두 국내의 황실 책봉과 마찬가지로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를 파견하여 고명을 전달하였다. 다만 명은 국왕과 다른 시기에 왕비를 책봉할 경우 자국의 사신을 파견하지 않고 북경에 온 조선 사신에게 고명을 지급하였다. 반면 청에서는 국왕, 왕비, 세자에 대해 모두 사신을 파견하여 고명을 전달하였다.
명으로부터 고명을 받는 절차는 『세종실록』 및 『단종실록』에 수록되어 있다. 다만 『국조오례의』를 비롯하여 이후 시기에 만들어진 전례서(典禮書)에는 고명 관련 의례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현재 조선이 받은 고명은 조선 후기 연잉군(延礽君) 세제(世弟) 책봉 고명, 영조 국왕 책봉 고명, 효장(孝章) 세자 책봉 고명 등 세 건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남아 있다.
명대 이전 외국 국왕을 책봉할 때 책과 제서(制書) 등이 불규칙적으로 사용된 것에 비해 명대 이후에는 책봉 문서로서 고명을 지속적으로 전달하였다. 또한 고명 전달 및 수령과 관련된 의례도 전례서를 통해 명문화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이전 시기 중국 왕조의 책봉과 비교해 볼 때 제도적으로 상당히 완비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