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왕은 고려 제33대(재위: 1388~1389) 왕이다.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 이후 왕위에서 물러난 우왕을 이어 9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왕이 직접 명나라 조정에 가는 것으로 왕위 계승을 인정받고자 했으나, 명 측에서 허락하지 않는 가운데, 1389년(창왕 1)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명분으로 폐위되었다가 강화에서 처형되었다. 재위 기간 중 조준(趙浚) 등이 전제(田制)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한 정책을 발의하였다.
1380년(우왕 6)생으로, 1388년(우왕 14) 6월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李成桂) 세력에 의해 부왕인 우왕이 강화로 추방된 후, 조민수(曺敏修)와 이색(李穡)의 추천으로 정비(定妃: 공민왕비)의 교(敎)를 받아 즉위하였다. 그때 나이 9세였다. 기록상으로는 당시 회군 세력 가운데에는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이성계는 왕씨(王氏)를 다시 세우기로 했다고 하여 우왕이 왕씨가 아닌 신씨, 즉 신돈(辛旽)의 아들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다만 요동 정벌군의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였던 조민수가 이인임(李仁任)과의 인연을 생각해 그 외종형제인 이림(李琳)의 딸 근비 소생인 창을 옹립하고자 하였고, 이색은 그 위세에 눌려 전왕(前王)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명분을 제공했다고 한다.
창왕 즉위 후 권세가의 토지 겸병을 금하고, 민의 공물을 경감하며 관(館)·역(驛)의 운용을 바로잡고 지방관들이 사사로이 선물 받는 것을 금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편민사의(便民事宜)를 반포했다.
7월, 대사헌(大司憲) 조준(趙浚)이 전제(田制)가 고르지 못한 데에서 오는 여러 폐단을 들어 글을 올렸고, 간관 이행(李行), 판도판서(版圖判書) 황순상(黃順常), 전법판서(典法判書) 조인옥(趙仁沃) 등도 사전(私田)의 폐단을 논하고 그 개혁을 청했다. 사헌부(司憲府)에서는 지방관의 임지(任地) 근무를 철저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명에 우왕이 양위했음을 고하고 창왕을 책봉해 줄 것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냈다. 조준의 탄핵으로 조민수를 창녕현(昌寧縣)으로 유배 보냈다.
8월, 조준이 고관의 어린 자제가 9품 이상 관직에 임명되는 것을 금하고, 지방관은 대간(臺諫)과 6조(曹)에서 천거한 재능 있는 자들을 파견하되 품계를 참상관(參上官)으로 올리고 안집사(安集使)는 혁파할 것을 청하였다.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이행 등이 첨설직(添設職: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새로 벼슬을 주거나 승직시키려 하여도 자리가 없을 때 주는 직첩)으로 군공(軍功) 이외에는 임명을 금지할 것을 청하였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전제를 의논하여 정하였다. 전선법(銓選法)을 복구해 문무(文武)의 인사 행정은 이부와 병부에서 행하게 했다. 대간과 6조로 하여금 수령(守令)의 직책을 감당할 만한 자들을 천거(薦擧)하게 하고, 사인(士人)으로 현령(縣令)과 감무(監務)를 삼았다. 여러 도의 안렴사(按廉使)를 고쳐서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삼았는데, 도관찰출척사는 모두 대간의 천거를 받은 자를 등용하고, 6도(道)의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각기 부사(副使)와 판관(判官)을 선발해 다시 양전(量田)하게 하였다. 일시적으로 사전(私田)의 조(租) 중에서 반만을 국가 재정에 충당하게 하였다.
9월, 우상시(右常侍) 허응(許應)은 균전(均田)의 강행을 상소하였다.
전왕인 우왕(禑王)을 강화에서 여흥군(驪興郡: 지금의 경기도 여주)으로 옮겼다.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상서사(尙瑞司)를 두었다. 10월에 급전도감(給田都監)을 설치하였다.
10월, 명에 하정사(賀正使)를 보내어 고려의 국정을 감독할 관리를 보내 줄 것, 고려의 자제들을 명에 보내어 입학시키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고, 11월에 다시 사신을 보내어 왕의 친조(親朝)를 요청하였다.
11월, 전법사(典法司)와 대간(臺諫)에서 최영(崔瑩)을 처형할 것을 상서하였고, 12월, 최영을 처형하였다.
12월, 전법판서(典法判書) 조인옥(趙仁沃) 등이 상소해 사원(寺院)의 토지 수입과 노비의 고용은 그 소재 관(官)에서 수납해 승도(僧徒)의 수를 헤아려 지급하고, 인가(人家)에 유숙하는 중은 범간(犯奸)으로 논하며, 귀천(貴賤)의 부녀는 절에 가는 것을 금해 위반하는 자는 실절(失節)로써 논하고, 부녀로서 중이 되는 자는 실행(失行)으로써 논하며, 향리(鄕吏)· 역리(驛吏)·노비로서 중이 되는 것을 금지할 것을 청하였다.
1389년(창왕 1) 2월 경상도원수(慶尙道元帥) 박위(朴葳)가 병선 100척으로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였다.
3월, 명에서 왕의 친조 요청을 거절하였다.
4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전제(田制)를 논의하였다. 이성계, 조준이 사전(私田)을 혁파하고자 하고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정도전(鄭道傳)과 대사성(大司成) 윤소종(尹紹宗) 등이 이에 동의했으며, 이색(李穡)은 옛 법을 가벼이 고칠 수 없다며 반대하고 이림(李琳)· 우현보(禹玄寶)· 변안열(邊安烈) 등이 이에 동조했다. 이에 각 관사로 하여금 사전의 혁파와 복구의 손익에 대해 의논하게 하였다.
6월, 명에 사신을 보내어 왕의 친조를 다시 요청하였다.
8월 양광도도관찰사 성석린(成石璘)의 청으로 주·군(州郡)에 의창(義倉)을 설치하였다. 대사헌 조준 등이 상소해 사전의 폐단을 논하고 경기(京畿)의 땅은 사대부에게 지급하고 그 밖의 땅은 모두 공상(供上)과 제사의 용도에 충당해 이로써 녹봉과 군수(軍需)의 비용을 충족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9월, 명 황제가 왕의 친조를 다시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전(前) 대호군(大護軍) 김저(金佇)와 전 부령(副令) 정득후(鄭得厚)가 이성계 암살을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김저를 옥에 가두었다. 김저가 자백하여, 변안열(邊安烈)·이림(李琳)·우현보(禹玄寶)·우인렬(禹仁烈)· 왕안덕(王安德)· 우홍수(禹洪壽) 등이 우왕을 옹립하기 위해 모의한 일이라고 하므로, 우왕을 강릉으로 옮기고 이성계, 심덕부(沈德符), 찬성사(贊成事) 지용기(池湧奇)·정몽주, 정당문학(政堂文學) 설장수(偰長壽), 평리(評理) 성석린(成石璘),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조준,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 박위, 밀직부사(密直副使) 정도전 등이 모여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라는 점을 들어 ‘ 폐가입진(廢假立眞)’을 주장하고, 창왕을 폐위하고 정창군(定昌君) 왕요(王瑤)를 왕으로 세울 것을 결정하였다. 공민왕비 정비(定妃)의 교지로 창왕(昌王)을 폐하여 강화(江華)로 추방하고 정창부원군(定昌府院君)을 왕으로 세웠다.
12월, 우왕은 강릉에서, 창왕은 강화에서 각각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