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고성(固城)이며, 감찰대부(監察大夫) 이교(李嶠)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여러 관직을 거쳐 밀직부사에 이르렀다. 1376년(우왕 2) 왜구가 덕적도·자연도(紫燕島)의 두 섬에 침입하자, 밀직부사(密直副使)로서 서북면선위사가 되어 이를 시찰하였으며, 다시 왜구가 진주 악양현(岳陽縣)에 침입하여 약탈을 감행하자 지밀직(知密直)으로 경상도조전원수가 되어 이를 방어하였다.
1378년 판밀직(判密直)으로서 전라도의 조전원수를 겸하여 연산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고, 이듬해 4월 판개성부사로서 그의 딸이 우왕의 근비(謹妃)로 책봉됨으로써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389년(창왕 1) 조준(趙浚)·이성계(李成桂) 등이 전제개혁(田制改革)을 주장하자 이를 반대하였고, 1389년(창왕 1) 7월 문하시중이 되고 김저(金佇)의 옥사에 연루되었으나, 창왕의 외할아버지라 하여 극형을 면하고 1390년(공양 2) 4월 철원에 유배되었다. 1390년 5월 윤이(尹彝)와 이초(李初)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성계 일파의 모함으로 충주로 유배되었다가 11월 외방종편(外方從便)되었지만, 이듬해 5월 낭사(郎舍) 허응(許應) 등의 탄핵을 받아 충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