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삼척(三陟). 아버지는 김정휘(金正暉)이다.
충선왕의 미움을 사서 충선왕의 재위 때 머리를 깎이고 팔전사(八顚寺)의 중이 되었다. 그 뒤 충선왕이 원나라의 압력으로 물러나고 충렬왕이 복위하자 환속하여 장군이 되었다.
1299년(충렬왕 25)에 경상전라양광채방사(慶尙全羅楊廣採訪使)가 되자 왕의 총애를 더욱 공고히 하려고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아 원망을 샀다.
그 뒤 전리총랑 친종호군(典理摠郎親從護軍)이 되었는데, 마침 호군 박규(朴圭)와 낭장 오인찬(吳仁贊)이 사절로 지방에 다니면서 선함(船艦)과 자량(資糧: 비용과 식량)을 몰래 비축하고 있음이 반역을 도모하려는 것 같다고 고발하여 국문을 당하게 하였다.
또한, 이 사건과는 별도로 그들의 모반의 상황을 소상히 적어 상소함으로써, 그 뒤 원사(元使)인 탑찰아(塔察兒)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이 취조하여 자백을 받아내게 하였다.
1304년 대호군(大護軍)으로 있으면서 왕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고세(高世)를 심양(瀋陽)에 보내어 본국인[人物]을 추쇄(推刷)하게 하였다. 내료(內僚) 김유(金儒)와 고여주(高汝舟)가 몰래 전왕(前王)에게 글을 보내어 이 일을 알리려고 하다가 발각되자 왕이 노하여 이들에게 장(杖)을 치고 순군(巡軍)에 하옥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