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우달치(迂達赤: 왕을 호위하던 숙위병)로 등용되었다가 김해부사에 올라 왜적을 격퇴하였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遼東征伐) 때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 최영(崔瑩)을 몰아냈다.
1389년(창왕 1)에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로 전함 100여 척을 이끌고 대마도(對馬島)를 쳐서 적선 300여 척을 불태워 크게 이겼다.
1389년(공양왕 1)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창왕(昌王)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추대한 공으로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고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으며, 공신이 되었다.
1390년(공양왕 2) 김종연(金宗衍)의 옥사에 연루되어 풍주(豐州)에 유배되었으나 곧 사면되어 회군공신(回軍功臣)이 되고, 조선 초에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거쳐 양광도절도사(楊廣道節度使)가 되어 왜구를 물리쳤다.
이 때 밀성(密城: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의 소경 이흥무(李興茂)의 옥사에 연루되어 구금되었다. 대간(臺諫)과 형조에서 대역죄로 논의되었으나 태조 이성계의 호의로 석방되어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로 나갔다가, 사헌부의 거듭되는 탄핵으로 파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