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충가(忠可), 호는 대은(大隱). 본래 중국 심양(瀋陽) 사람이다. 원나라 말기에 병란으로 당시 심양에 가 있던 공민왕(恭愍王)을 따라 고려에 들어와 원주(原州)를 본관으로 받았다.
1351년 진사시에 장원하고, 1361년(공민왕 10) 안우(安祐)를 따라 홍건적을 패주시켜, 1363년 2등공신에 올라 판소부감사(判小府監事)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1362년 개성(開城)을 수복한 공로로 1363년에 1등공신이 되었다.
예의판서(禮儀判書)가 되어 추성보조공신(推誠輔祚功臣)의 호를 받았고,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최영(崔瑩)과 더불어 제주를 정벌한 뒤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문하평리(門下評理)를 역임하였다.
우왕(禑王) 때 추충양절선위익찬공신(推忠亮節宣威翊贊功臣)의 호를 받은 뒤 양광전라도도지휘사 겸 조전원수(楊廣全羅道都指揮使兼助戰元帥)로서 나세(羅世)·조사민(趙思敏) 등과 함께 왜구를 크게 물리치고 돌아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승진하였다.
이어 도순찰사(都巡察使) 이성계(李成桂)의 부장으로 운봉(雲峰)과 황산(荒山)에서 왜적을 대파하고 개선한 뒤, 정방제조(政房提調)가 되어 그 세력이 임견미(林堅味)·이인임(李仁任) 등과 겨룰 만큼 커졌다. 단양(丹陽)과 안동(安東)의 왜구를 몰아낸 뒤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에 봉해지고 판삼사사(判三司事), 뒤에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다.
그러나 1389년(창왕 1) 대호군 김저(金佇) 등이 이성계의 세력을 저지하고 우왕의 복위를 모의했던 일이 발각되어 이림(李琳)·우현보(禹玄寶)·이색(李穡) 등과 함께 연루되면서, 한양(漢陽)에 유배되었다가 1390년(공양왕 2)에 처형되었다.
김천택(金天澤)의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전해오는 「불굴가(不屈歌)」가 변안열의 시가로 밝혀졌다. 따라서 변안열의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