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양천(陽川). 아버지는 개성윤 허교(許喬)이다. 1371년(공민왕 20)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낭사(郎舍)가 되었다.
1391년(공양왕 3) 시폐를 들어 배불론(排佛論)을 주장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다. 그 뒤 좌상시(左常侍)에 보직되어 이성계(李成桂)의 신진세력에 가담하여 시폐를 혁신할 것과 전제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뒤 여러 요직을 거쳐 태종초에는 대사헌이 되어 배불정책을 강경하게 주장하였고, 부녀의 정절을 중시하여 과부의 개가(改家)를 금지하자고 주장하였다.
1405년(태종 5) 공안부윤(恭安府尹)으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뒤에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에 이르러 은퇴하였다. 시호는 경혜(景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