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고려 후기, 문하시중·좌군도통사 등을 역임한 무신.
가계 및 인적사항
주요 활동
1368년(공민왕 17) 명(明)나라가 원(元)나라 서울인 연경(燕京)을 포위하자 좌상시(左常侍)로서 의주(義州)·정주(靜州) 등 처의 안무사(安撫使)가 되어 국경지대의 있을 수도 있는 위험에 대비하였으며, 충근보리공신(忠勤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우왕(禑王) 대에는 경상도 도순문사, 전라도 조전원수(助戰元帥), 서북면(西北面) 도체찰사(都體察使) 등 각지의 군사 지휘관으로 활동하며 왜구(倭寇)를 물리치고 명나라와의 충돌에 대비하였다. 또한 중앙에서도 1379년(우왕 5) 문하평리(門下評理), 1383년(우왕 9)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385년(우왕 11)에는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遼東征伐) 때에는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로 임명되어 서북면과 양광도, 전라도, 경상도의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폐하고 창왕(昌王)을 세우는 데 가담하였다. 이후 군권을 장악하여 충근양절선위동덕안사공신(忠勤亮節宣威同德安社功臣)의 호를 받고, 양광·전라·경상·서해·교주도 도통사가 되었다.
1389년(창왕 1) 이성계 일파의 전제개혁(田制改革)에 반대하다가 조준(趙浚) 등의 탄핵으로 창녕에 유배되었다. 곧바로 창왕의 생일에 특사로 풀려나왔으나, 다시 우왕의 혈통을 둘러싼 논쟁으로 이성계 일파에 대항하다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 1390년(공양왕 2) 다시 창녕으로 유배되었다가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 변태섭, 『고려사의 연구』 (삼영사, 1982)
논문
- 김당택, 「고려 말 대외관계의 격동과 무장세력의 정치적 지향」 (『한국사시민강좌』 35, 일조각, 2004)
- 김당택, 「고려말 이성계의 정적」 (『한국중세사연구』 31, 한국중세사학회, 2011)
- 유영옥, 「‘폐가입진’에 대한 조선후기 사대부의 비판적 인식」 (『역사와 경계』 83, 부산경남사학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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