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원수(都元帥) 이하 여러 장수들을 통솔하였다. 1360년(공민왕 9) 왜구가 대규모로 침입하자 좌정승(左政丞) 유탁(柳濯)을 경기병마도통사(京畿兵馬都統使)로 임명하여 동강(東江) 및 서강(西江)의 병마사(兵馬使)들을 지휘토록 한 것이 그 최초의 출현이다.
이후 출정군이 편성될 때마다 이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도원수 이하의 여러 원수 및 병마사를 통솔토록 하였는데, 이러한 지휘체계의 제도적 정비는 1369년 북원(北元)과의 외교를 단절하고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이인임(李仁任)을 서북면도통사로 파견한 것을 계기로 이루어졌다.
즉 이 때 도통사의 하부 기구로 진무소(鎭撫所)와 경력사(經歷司)를 두고 종2품 및 정3품의 진무(鎭撫) 2명, 4품관인 경력(經歷) 2명, 5품 내지 6품으로 임명되는 지사(知事) 2명을 배치함으로써 군령 및 군사행정 기구를 모두 갖춘 군사력의 최고지휘부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한편 우왕대 이후로는 한 사람이 몇 개 도(道)의 군사력을 지휘할 수 있는가에 따라 3도도통사니 6도도통사니 하는 직함을 갖게 되었는데, 1388년(우왕 14)의 요동(遼東) 정벌 때 8도도통사였던 최영(崔瑩)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 밖에 수군(水軍)에 대한 지휘권을 가진 사령관으로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란 직함도 있었다. 전란이 계속되던 시기에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만큼 이러한 도통사에는 보통 왕이 신임하는 최고위 관료가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