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첨성대는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시기의 천문관측소이다. 『삼국유사』에 신라 선덕여왕 때 축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맨 밑의 기단부와 그 위의 술병형 원통부, 다시 그 위의 ‘우물정(井)’자석 정상부로 구성되고 총 높이는 9.51m이다. 기단부의 남쪽 변이 정남 방향에서 동쪽으로 19° 돌아서 있다. 원통부는 총 27단을 쌓아올렸는데 제13단에서 15단에 걸쳐 정방형의 창구가 나 있다. 제19·20단과 제25·26단에는 장대석을 걸쳐 우물정자를 만들었고 제27단 위의 정상부에도 두 단의 정자석이 있다. 천문현상을 관찰하여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곳이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높이 약 9.5m. 첨성대가 위치한 곳은 옛날에는 경주부(慶州府) 남쪽 월남리(月南里)라고 하였고, 계림(鷄林)의 북방 약 150∼200m, 내물왕릉 동북방 약 300m 되는 곳이다. 이 근방을 속칭 비두골이라고도 한다.
첨성대는 『삼국유사』 기이(紀異) 권2의 별기(別記)에 “이 왕대(王代)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를 쌓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신라 선덕여왕 때(재위 632∼647)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같은 책 왕력(王曆) 제1에 신라 제17대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이야기 끝에 “능은 점성대(占星臺) 서남에 있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현재의 내물왕릉과 첨성대의 위치 관계와 잘 부합된다. 이 기록에서 첨성대가 별명으로 점성대라고 불렸던 것을 알 수 있다.
첨성대의 기능에 대해서는 조선 말기 이후 일제강점기까지도 천문대(天文臺), 즉 천문관측을 하는 곳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광복 이후에 갑자기 이에 대한 이설이 제기되며, 제단(祭壇) · 기념물 · 불교관계 건축물 등의 여러 가지 설과 이견이 속출되었다. 이런 설에 대하여 종전의 전통적인 입장에서 천문대로 해석하는 연구도 물론 진행되었다.
이설들이 나온 이유의 하나는 현존하는 첨성대가 평지(平地)에 있다는 것, 첨성대 자체의 구조상 그 위로 오르내리는 통로가 매우 불편하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적 환경은 나라마다 다른 첨성대 또는 점성대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고대천문학은 크게 천문(天文)과 역법(曆法)으로 양분된다. 중국의 사서(史書)에도 『역지(曆志)』 또는 『율력지(律曆志)』와 『천문지(天文志)』가 뚜렷하게 구별되어 기재되어 있다. 천문관측은 크게 두 분야로 나눌 수 있겠는데, 첫째는 역법을 만들기 위한 태양 · 달 · 행성의 운행을 관측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점성(占星)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항성(恒星)의 배치로 정해진 별자리[星座]를 지방 또는 국가로 분배하였다.
그 분야에서 일어나는 제반 천문현상을 관찰하여 국가의 길흉을 점치는 일이다. 이러한 점성은 조선시대 말까지도 계속되었는데, 고대로 올라갈수록 그 비중이 컸던 것이다. 그러므로 또는 고대인의 자연철학적인 천문관측이 국가나 왕조에는 매우 중요하였으며, 되도록이면 왕궁에 가까워야 하였음은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점성적인 것이 제사(祭祀)나 점복(占卜)과 가까울 수도 있음직한 것이다.
구조는 아래의 기단부(基壇部), 그 위의 술병형의 원통부(圓筒部), 다시 그 위의 정자석(井字石) 정상부(頂上部)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땅속에는 잡석(雜石)과 목침(木枕) 크기의 받침돌, 그리고 기단부 서쪽으로는 일렬로 자연석이 놓여 있다. 이 기초를 다진 돌 위에 2단으로 된 기단석이 놓여 있다. 기단부는 정방형으로 한 변의 길이가 하단은 5.36m, 상단은 5.18m이며, 두 단이 다 높이가 39.5㎝로서 두 단을 합쳐서 79㎝의 높이가 된다. 이 기단부는 남쪽 변이 정남(正南)에서 동쪽으로 19° 돌아서 있다.
기단 위의 원통부는 높이 약 30㎝인 부채꼴의 돌로 27단을 쌓아올렸는데, 27단의 높이는 8.08m이며, 최하단의 원둘레는 16m, 제14단의 둘레는 11.7m, 최상부인 제27단의 둘레는 9.2m이다. 제13∼15단에 걸쳐서 정남에서 동쪽으로 약 16°가 되는 방향을 향하여 한 변이 약 95㎝인 정방형의 창구(窓口)가 나 있다. 이 창구의 아랫변의 돌은 대형의 평판석(平板石)으로 되어 있어서 내부의 면적을 크게 차지하고 있다.
창구의 내부 아래쪽은 잡석으로 채워져 있으며, 그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는 형태이다. 그 내벽은 선형석(扇形石)의 꼭지 부분이 삐죽삐죽 나와 있다. 원통부의 제19단과 제20단에는 각각 남북 · 동서로 2개씩의 장대석이 걸쳐 있어 네 개가 ‘井’자를 이루는데, 그 장대석의 끝은 원통부의 바깥까지 뚫고 나와 있다. 같은 구조가 제25단과 제26단에도 있는데, 여기서는 아래의 것이 동서, 위의 것이 남북으로 걸쳐서 ‘井’자를 이룬다.
맨 위인 제27단에는 동쪽 절반이 평판석으로 막혀 있다. 이 평판석은 그 아래의 장대석에 놓여 있는데, 윗면이 둘레의 제27단보다 약 6㎝가 낮게 되어 있다. 그리고 평판석이 없이 환하게 뚫린 서쪽 절반의 공간으로 나온 제27단의 선형석의 끝에는 3개에 걸쳐서 일직선으로 인턱이 패어 있다. 두께 6㎝ 정도의 나무판[木板]을 동반부의 평판석과 이 인턱에 걸치면 중앙에서 위로 뚫린 공간이 막히고 상부에는 ‘井’자석 안에 네모난 방이 형성된다.
제27단의 원통부 위에는 각 네 개씩으로 짜인 ‘井’자석이 두 단에 걸쳐서 놓여 있어서, 사각형의 정상부를 이룬다. 이 ‘井’자석의 길이는 306㎝, 높이와 너비는 각각 32㎝, 두 단의 높이를 합치면 64㎝, ‘井’자석이 이루는 내부 정방형의 한 변은 220㎝로서 재래의 한옥방 한 칸의 넓이가 된다. 이 ‘井’자석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에 자리를 바로잡아서 떨어지지 않게 수리를 하였다고 한다. 수리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때 방향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하나, 현재로서는 남쪽면이 정남에 대하여 서쪽으로 약 8°가 돌아간 방향을 향하고 있다.
첨성대의 석재는 화강석(花崗石)인데 표면에 노출된 부분은 모두 다듬어져 있다. 석재의 개수는 종래 365개라고 하였으나 기단석까지 포함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정확히 365개는 아니다. 이와 같은 구조로 총 높이가 9.51m가 되는데, 홍사준(洪思俊)은 사다리 세 개를 마련하여 한 개는 지상에서 중앙 창구까지, 한 개는 중앙 창구 안에서 내부의 제19 · 20단의 ‘井’자석까지, 나머지 한 개는 제19 · 20단에서 제25 · 26단의 ‘井’자석까지 걸쳐서 정상의 ‘井’자석 안으로 올라갈 수 있으며, 오르내리는 데 큰 불편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정상부에 서거나 앉거나 또는 누워서 하늘을 관찰하는 데 매우 편리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