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전기에, 『칠정산내편』, 『칠정산내편정묘년교식가령』 등을 저술하였으며, 세종대의 천문·역법 사업에 크게 공헌한 천문학자.
개설
활동사항
이 때 왕명으로 정흠지(鄭欽之) · 정초(鄭招) · 정인지(鄭麟趾) 등이 수시력법(授時曆法)과 대통력태양태음통궤(大統曆太陽太陰通軌) 등에 대하여 그 계산법을 밝히고, 약간의 은괄(檃括:교정)을 가해서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만들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규장각본인 『칠정산내편』과 『태양통궤』 · 『태음통궤』 등이 모두 이순지와 김담의 편찬으로 되어 있는데 이 두 사람이 『칠정산내편』의 교정 · 편찬에도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25세 때에는 전료(殿僚)와 더불어 국어와 음의(音義)를 보정해서 올렸다. 28세 때에는 봉상시주부(奉常寺主簿)가 되었고, 이듬해에 정인지 · 이순지 · 박윤창(朴允昌)과 더불어 경기도 안산(安山)에서 양전(量田)을 시행할 때도 공이 컸다.
29세 때는 이조정랑이 되었고, 제언종사관(堤堰從事官)이 되어 이순지와 더불어 언제공사(堰堤工事)에서 계산을 맡았다. 32세 때 승문원부교리로 있을 때, 명을 받아 『전부구등지법(田賦九等之法)』을 찬정하였다.
1448년(세종 30) 서운관부정(書雲觀副正)이 되었고, 이듬해 친상을 당하였으나 계속 출사하여 역법과 측후의 일을 하였다.
1451년(문종 1) 사헌부장령이 되어 불사(佛事)를 배척하는 소를 여러 번 올렸으며, 1452년 홍문관직제학이 되었고, 이어 충주목사로 나갔다. 1456년(세조 2) 안동부사, 1458년 경주부윤, 1464년 중추원사가 되었다.
이순지와 더불어 당대에 가장 뛰어난 천문학자로서 세종대의 천문 · 역법 사업에 크게 공헌하였고, 정인지 · 정초 · 정흠지 · 이순지 등과 더불어 『칠정산내편』 · 『칠정산내편정묘년교식가령(七政算內篇丁卯年交食假令)』 · 『칠정산외편』 · 『칠정산외편정묘년교식가령(七政算外篇丁卯年交食假令)』 · 『대통력일통궤(大統曆日通軌)』 · 『태양통궤(太陽通軌)』 · 『태음통궤(太陰通軌)』 · 『교식통궤(交食通軌)』 · 『오성통궤(五星通軌)』 · 『사여전도통궤(四餘纏度通軌)』 · 『중수대명력(重修大明曆)』 · 『경오원력(庚午元曆)』 · 『선덕십년월오성릉범(宣德十年月五星陵犯)』 등 많은 천문역서를 교정, 편찬하였다.
그가 충주목사로 재직할 때 관내에 도적이 많아 고을 백성들이 몹시 두려워하였는데 그는 이 도적을 잘 다스렸으며, 장물의 증거를 발견하면 비록 그 양이 적더라도 이를 용서하지 않았다.
광해군 때에 사림에서 향현사(鄕賢祠)와 문계서당(文溪書堂)을 지었는데, 뒤에 다시 구강서원(龜江書院)과 단계서원(丹溪書院)으로 옮겨 개명되었다가 흥선대원군 때 철폐되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참고문헌
- 『세조실록』
- 『연려실기술』
- 『증보문헌비고』
- 『무송헌문집(撫松軒文集)』
-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
-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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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문과 급제 : 『국조문과방목』 卷之二(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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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저수지 공사 담당 : 『세종실록』 105권, 1444년(세종 26) 8월 12일. "김종서·이숙치·정인지 등과 제언을 축조하는 일을 의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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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시호 추증 : 『세조실록』 33권, 1464년(세조 10) 7월 10일. "중추원 사 김담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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