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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에, 농지(農地)를 조사 · 측량하여 실제 작황을 파악한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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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양전은 고려 및 조선시대에 농지(農地)를 조사·측량하여 실제 작황을 파악하던 제도이다. 가장 중요한 생산 자원인 경작지를 매개로 국가가 농민을 지배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었다. 양전은 국가 재정의 기본을 이루는 전세(田稅)의 징수를 위하여 전국의 전결(田結) 수를 측량하고 토지 파악에서 누락된 토지를 적발하여 불법적으로 탈세를 행하는 토지가 없도록 함으로써 합리적인 전세 징수를 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양전을 통하여 전국 경작 면적의 총합인 결총(結總)이 확정되면, 그에 따라 각 지방의 전결 세액이 확정되고 토지마다 배정해 징수했다.

목차
정의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에, 농지(農地)를 조사 · 측량하여 실제 작황을 파악한 제도.
내용

양전은 고려시대에도 여러 차례 행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경국대전』(1485년, 성종 16)에서 『대전회통』(1865년, 고종 2)에 이르기까지 법제상으로는 20년에 한 번씩 양전을 실시하고, 이에 따라 새로 양안(量案)을 3부씩 작성하여 호조와 당해 도 · 읍에 각각 1부씩 보관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양전을 통해 파악된 각 지방의 결총은 양전 대장에 기록되는 데서 원장부라고도 했다. 원장부 결총에서 각종 면세결(免稅結)과 유래진잡탈(流來陳雜頉)을 제외한 것이 시기결총(時起結總)으로 수세(收稅)의 대상이 되었다. 유래진잡탈은 재해가 여러 해 계속되어 세액 부과 대상에서 면제되면서 여러 가지 폐단을 지닌 진전(陳田)을 뜻한다. 또 진전이란 토지대장인 전안에는 등재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휴경 상태에 있는 토지를 말한다.

양전은 대규모 사업이었기 때문에 그 비용과 인력의 소모가 막대했다. 더구나 양전이 실시되면 그 결과에 따라 토지 소유자들 사이에 이해관계가 첨예했기 때문에 법전에 규정된 원칙대로만 행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미봉책으로 진전만을 조사하는 사진(査陳)이 행해지기도 했다.

조선시대 양전의 구체적인 내용은 세종 연간에 성립된 전세(田稅) 수취 제도인 공법(貢法)(1444년, 세종 26)을 통해 알 수 있다. 공법은 과전법(科田法)의 일률적인 수조액을 재조정하기 위해 토지 비옥도에 따른 전분(田分) 6등과 풍흉에 따른 연분(年分) 9등의 조세 징수 기준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전품(田品), 즉 토지의 등급이 한 번 정해지더라도 시일이 경과하면 토질이 달라져 전품의 재사정(再査定)이 필요해지고, 또 자연환경의 변동과 수리 시설, 시비 등 농지 개량에 따라 비옥도(肥沃度)가 변동해 수시로 전품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20년마다 한 번씩 개량 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양전이 실시될 때 해당 지역에서 실제로 이해관계의 초점이 되기 때문에 가장 많은 갈등을 초래하는 것이 바로 해당 지역 경작지에 대한 전품 결정이었다. 절대 면적이 동일한 경작지라도 전품의 평가 등급이 높으면 더 많은 세금을 내야했기 때문이다.

양전의 목적이 공정한 수세를 위한 기초 조사에 있었던 만큼, 양전할 때의 조사 기준은 수세의 가능성 여부, 감세(減稅)의 필요 여부에 두어졌다. 『경국대전』에는 경작지 종류를 다음과 같이 6개 범주로 규정했다. 매년 경작하는 경작지인 정전(正田) · 토질이 비옥하지 못해서 휴경하는 해가 있기 때문에 경작하는 해에만 과세하는 토지인 속전(續田) · 토질이 점차로 떨어져서 본래의 전품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율을 감해야 하는 토지인 강등전(降等田) · 전품을 강등하고도 휴경함으로써 경작한 때에만 과세하는 토지인 강속전(降續田) · 경작지가 아니었던 땅이 처음으로 개간되어 세율을 새로 정해야 하는 토지인 가경전(可耕田) · 화전(火田)이 그것이다.

경작지를 측량할 때 요령으로는 그 형태가 뚜렷하지 못한 곳은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으로 만들며, 경사진 토지는 별도로 토지의 형태를 만들도록 했다. 한편, 경작지 측량은 결부제(結負制)에 따라 이루어졌다. 결부제는 토지의 면적 단위임과 동시에 수확 단위 · 수세 단위를 표시하는 전통 시대 우리나라 특유의 제도이다. 1결의 실제 면적을 척관법으로 환산하면 대략 상등전 1결이 1,846평, 중등전 1결이 2,897평, 하등전 1결은 4,184평 정도였다. 결부제의 특성은 같은 1결이라도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절대 면적이 다른 반면, 1결에는 일률적으로 같은 액수의 세를 거두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양전에 쓰이는 척도(양전척)는 토지의 등급에 따라 달랐다. 공법에서는 주척(周尺)을 사용해 1등전 주척 4.77척, 2등전 8.18척, 3등전 5.70척, 4등전 6.43척, 5등전 7.55척, 6등전 9.55척으로 하였다. 그리고 5결마다 천자문의 자호(字號)로써 표시하여 일련번호로 사용했고, 각 토지의 사표(四標)와 주인의 이름을 양안에 올렸다. 사표란 양전을 할 때 해당 토지의 동서남북에 위치한 지형지물을 기록한 표시로, 토지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1653년(효종 4)에는 양전법이 개정되었다. 그때까지 사용하던 등급에 따른 척의 사용을 폐지하고 1등 전척 하나로 통일해 측량했으며, 대신 면적을 달리했다. 즉, 1등전 100부의 면적을 2등전 85부, 3등전 70부, 4등전 55부, 5등전 40부, 6등전 25부로 산정했다.

양전을 실시할 때는 중앙에서 지방에 균전사(均田使)를 파견해 양전을 감독하고 수령 및 실무자의 위법 행위를 처리하도록 했다. 양전의 부정에 관련되어 수령에서 파면된 자는 5년이 지나야 복직되도록 하는 등 엄벌 규정을 두었다. 그러나 토지제도가 문란해지고 양전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전적(田籍)이 부실해져서 은결(隱結(은루결(隱漏結), 은여결(隱餘結)이라고도 한다)이 생기는 한편 부세불균(負稅不均) · 백지징세(白地徵稅) 등이 발생하였다. 은결은 경작지의 원장부에서 아예 토지를 누락시키거나 그 면적을 축소해서 기록하는 것을 말하며, 백지징세란 경작하지 않은 토지에 대해 조세를 거두는 것을 말한다. 특히, 토품(土品)의 높고 낮음은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서 토호들은 균전사에게 뇌물을 쓰거나 농간을 부려 양안에서 자신의 토지를 누락시키거나 그 토품을 낮게 매기는 반면, 빈농들은 척박한 토지인데도 높은 등급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양전 시행의 중요한 사례는 다음과 같다. 여말선초에는 조선의 건국 주도 세력이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토지개혁을 실시했는데 그 기초 작업으로 양전 사업을 벌였다. 1389년부터 시작해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하고 6개 도에 실시했다. 이 조사 사업은 그 이듬해에 일단 끝마쳤다. 매우 불철저하게 진행되었는데도 국가가 파악한 토지 면적은 79만 8,116결이나 되었다. 그 뒤 양전 사업을 계속 실시하여,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총 토지면적 171만여 결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것은 고려 말에 파악한 50만 결에 비하면 3배가 넘는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토지 사정은 아주 어려워졌다. 7년에 걸친 전쟁으로 전결은 황폐해졌고 토지대장은 흩어져 버렸다. 진전은 개간되지 않은 채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전쟁 전에 150여만 결 내지 170여만 결에 이르던 8도의 전결 총액이 전쟁 후에는 시기전결이 30여만 결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 끝난 뒤 1613년(광해군 5)에 최초로 삼남에 양전이 실시되었다. 이후 1634년(인조 12)의 삼남 양전, 1663년(현종 4)의 경기도 양전, 1665년의 함경도 양전, 1669년의 충청도 20읍과 황해도 4읍에 대한 양전, 1701년(숙종 27)의 황해도 3읍 양전과 1709년의 강원도 16읍 양전, 1719년과 그 이듬해의 삼남 양전 등이 대표적인 양전이다.

현종 대와 숙종 대에 일부 지역을 단위로 행해진 경우도 있었지만, 숙종 대까지의 양전은 대개 도 단위 이상에서 실시되었다. 그러나 영조 대 이후 조선 말기의 양전에서는 전정(田政)의 문란이 심한 지역에서만 수시로 미봉적인 양전이 실시되었을 뿐이다. 농지의 경계 및 소유권 분쟁이 일어나는 등 토지 문제가 심각해지고 한편으로 19세기에 들어 결렴(結斂)이 늘어나고 정부 세입이 줄어들자, 순조 연간에는 대대적인 양전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대토지 소유자나 지방의 권세가들을 중심으로 반대론이 제기되면서 결국 시행하지 못하였다.

1898년에서 1904년까지 실시한 양전은 숙종 말년의 삼남 양전 이후 처음으로 실시된 전국 규모의 양전이자 조선 정부가 시도한 마지막 양전이었다. 이는 조선 후기 이래로 제기되었던 양전론을 바탕으로 하고, 한편으로는 1860년대 이후의 농민항쟁, 그리고 1894년의 농민전쟁 등을 수습하려는 해결책의 하나였다.

양전의 담당 기구는 원래 호조였으나 이때에 이르러 양전 사업을 맡을 새로운 독립 기구로 양지아문(量地衙門)이 설치되었다. 양지아문에서는 1899년 여름부터 양전을 담당할 실무진으로서 양무감리(量務監理)와 양무위원이 임명됨에 따라 여러 곳에서 동시에 양전이 실시되었다. 1901년 흉년으로 양전 사업이 중단될 때까지 양지아문에서 양전을 끝낸 지역은 전국 331개 군 가운데 경기 15군, 충북 17군, 충남 22군, 전북 14군, 전남 16군, 경북 27군, 경남 10군, 황해 3군으로서 모두 124개 군이었다.

양지아문의 양전 사업이 일단 중단된 뒤 1901년 10월 새로운 기구인 지계아문(地契衙門)이 설립되었다. 지계아문에서는 지계 발행을 위한 사업에 착수하면서, 사업의 성격상 1902년 3월 양지아문의 기구를 지계아문에 통합시켰다. 양지아문에 이어서 지계아문이 양전을 시행한 군은 경기 6, 충남 16, 전북 12, 경북 14, 경남 21, 강원도 26군으로 모두 94개 군이었다. 조선 말기의 광무 양안에 이르기까지도 토지를 결부법으로 파악한다는 사실과 전품을 6등급으로 평가한다는 종래의 양전 원칙을 그대로 준수, 적용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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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통편(大典通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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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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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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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자료

기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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