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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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전근대사회에서 농지를 조사 · 측량하여 실제 작황을 파악하던 제도. 소유권을 국가차원에서 확인하는 계기도 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중세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토지를 매개로 농민을 지배하기 위한 기초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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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우리 나라 전근대사회에서 농지를 조사 · 측량하여 실제 작황을 파악하던 제도. 소유권을 국가차원에서 확인하는 계기도 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중세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토지를 매개로 농민을 지배하기 위한 기초작업이었다.
개설

양전은 국가재정의 기본을 이루는 전세의 징수를 위하여 전국의 전결(田結) 수를 측량하고 누락된 토지를 적발하여 불법적으로 탈세를 행하는 토지가 없도록 한다는 점과 수확량에 따라 토지면적을 표시하는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결부제(結負制) 하에서 전세의 합리적인 징수를 꾀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따라서 중세사회의 토지제도 위에서 그 토지를 운영하기 위한 첫 작업이었으며 토지제도를 전제로 한 전정(田政)의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문제였다. 양전을 통하여 전국의 결총(結總)이 확정되면, 그에 따라 각 지방의 전결세액이 확정되고 토지마다 배정해 징수하였다.

말하자면 이 시기의 전세행정은 양전을 통한 결총의 확보를 기초로 하여 운영되고 있었다. 양전을 통해 파악된 각 지방의 결총은 양전대장에 기록되는 데서 원장부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원장부결총에서 각종의 면세결(免稅結)과 유래진잡탈(流來陳雜頉 : 재해가 여러 해 계속되어 세액대상에서 면제되면서 여러 가지 폐단을 지닌 진전)을 제외한 것이 시기결총(時起結總)으로서 수세의 대상이 되었다.

결총은 새로이 양전하여 결총이 재조정될 때까지 전정을 운영하는 데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새로이 양전을 할 경우에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때까지 기준이 되어 온 결총을 크게 변동시키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내용

양전은 고려시대에도 여러 차례 행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경국대전≫에서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법제상으로는 20년에 한 번씩 양전을 실시하고, 이에 따라 새로 양안(量案)을 3부씩 작성하여 호조와 당해 도·읍에 각각 보관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양전은 대규모 사업으로서 그 비용과 인력의 소모가 막대하였고, 토지소유자 간에 이해관계가 첨예했기 때문에 원칙대로 행해지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미봉책으로 진전(陳田)만을 조사하는 사진(査陳)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양전의 구체적인 내용은 세종 연간에 공법(貢法)을 통해 알 수 있다. 공법은 과전법(科田法)의 일률적인 수조액을 재조정하기 위해 전분6등과 연분9등의 조세 징수 기준을 두고 있었다. 전분6등은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토지를 6등급으로 나누는 것이었다.

따라서, 전품(田品 : 토지의 등급)이 한 번 정해지더라도 시일이 경과하면 토질이 달라져 전품의 재사정(再査定)이 필요해지고, 또 자연환경의 변동과 수리시설, 시비 등 농지개량에 따라 비옥도(肥沃度)가 변동해 수시로 전품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20년마다 한 번씩 개량을 하기로 하였다.

양전의 목적이 공정한 수세를 위한 기초조사에 있었던 만큼 양전할 때의 조사기준은 수세의 가능성 여부, 감세(減稅)의 필요 여부에 주어졌다.

≪경국대전≫에는 정전(正田 : 항시 경작하는 토지)·속전(續田 : 토질이 비옥하지 못해 때로 휴경함으로써 경작할 때만 과세하는 토지)·강등전(降等田 : 토질이 점차로 떨어져 본래의 전품을 유지하지 못해 세율도 감해야 하는 토지)·강속전(降續田 : 강등을 하고도 휴경함으로써 경작한 때에만 과세하는 토지)·가경전(可耕田 : 개간해 세율을 새로이 정해야 하는 토지)·화전(火田)의 여섯 가지 기준을 설정하였다.

측량할 때의 요령으로는 토지의 형태가 뚜렷하지 못한 곳은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으로 만들며, 경사진 토지는 별도로 토지의 형태를 만들도록 하였다. 한편, 결부제의 특성이 같은 1결이라도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면적이 다른 반면 1결에 일률적으로 같은 액수의 세를 거두는 만큼 양전에 쓰이는 척도(양전척)는 토지의 등급에 따라 여러 종류였다.

공법에서는 주척(周尺)을 사용해 1등전 주척 4.77척, 2등전 8.18척, 3등전 5.70척, 4등전 6.43척, 5등전 7.55척, 6등전 9.55척으로 하였다. 그리고 5결마다 천자문의 자호로써 표시하였고 각 토지의 4표(標)와 주인의 이름을 양안에 올렸다.

1653년(효종 4)에는 양전법이 개정되었는데 이 때까지 사용하던 등급에 따른 척의 사용을 폐지하고 1등전척 하나로 통일해 측량하였으며, 대신 면적을 달리하였다. 즉, 1등전 100부의 면적을 2등전 85부, 3등전 70부, 4등전 55부, 5등전 40부, 6등전 25부로 산정하였다.

양전할 때는 특별히 중앙에서 균전사(均田使)를 파견해 양전을 감독하고 수령 및 실무자의 위법행위를 처리하도록 하였다. 양전의 부정에 관련되어 수령으로서 파면된 자는 5년이 지나야 복직되도록 하는 등 엄벌 규정을 두었다. 그러나 토지제도가 문란해지고 양전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전적(田籍)이 허실해져 은결·누결이 생기는 한편 부세불균(負稅不均)·백지징세(白地徵稅) 등이 발생하였다.

특히, 토품(土品)의 높고 낮음은 중요한 문제여서 토호들은 뇌물을 쓰거나 농간을 부려 양안에서 토지를 누락시키거나 헐하게 매기는 반면 빈농들은 척박한 토지인데도 높은 등급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양전 시행의 중요한 사례는 다음과 같다. 여말선초에는 조선의 건국주도세력이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토지개혁을 실시했는데 그 기초작업으로서 양전사업을 벌였다. 1389년부터 시작해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하고 6개도에 실시하였다.

이 조사사업은 그 이듬해에 일단 끝마쳤다. 매우 불철저하게 진행되었는데도 국가 수중에 장악된 토지면적은 79만8,116결이나 되었다. 그 뒤 양전사업을 계속 실시하여,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총토지면적 171만여 결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것은 고려 말기에 50만 결을 조사한 것에 비하면 실로 3배가 넘는다.

이어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토지사정은 아주 어려워졌다. 7년 간에 걸친 전쟁으로 전결은 황폐해지고 토지대장은 흩어져 버렸으며 진전은 개간되지 않은 채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전쟁 전에 150여만 결 내지 170여만 결에 이르던 8도의 전결이 전쟁 후에는 시기전결이 30여만 결에 불과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 끝난 뒤 1593∼1594년에 처음으로 전국적인 규모로 양전이 이루어졌다. 이 후 1613년(광해군 5)의 삼남양전, 1634년(인조 12)의 삼남양전, 1663년(현종 4)의 경기도양전, 1665년의 함경도양전, 1669년의 충청도 20읍과 황해도 4읍에 대한 양전, 1701년(숙종 27)의 황해도 3읍 양전과 1709년의 강원도 16읍 양전, 1719년과 그 이듬 해의 삼남양전 등이 대표적인 양전이다.

숙종대까지의 양전은 현종대와 숙종대에 일부 지역을 단위로 행해진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 도 단위 이상에서 실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영조대 이후 조선 말기의 양전 이전까지는 전정의 문란이 심한 지역에서만 수시로 미봉적인 양전이 실시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농지의 경계 및 소유권 분쟁이 일어나는 등 토지문제가 심각해지고 한편으로는 19세기에 들면서 결렴이 늘어나고 정부의 세입이 줄어들자, 순조 연간에는 대대적인 양전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대토지소유자나 지방의 권세가들을 중심으로 한 반대론이 제기되면서 결국 시행하지 못하였다.

한말 1898년에서 1904년에 이르기까지 행해진 양전은 숙종 말년의 삼남양전 이후 처음으로 실시된 전국 규모의 양전이자 조선정부가 시도한 마지막 양전이었다. 이는 조선 후기 이래로 제기되었던 양전론을 바탕으로 하고, 한편으로는 1860년대 이후의 농민항쟁, 그리고 1894년의 농민전쟁 등을 수습하는 해결책의 하나였다.

양전의 담당기구는 원래 호조 소관이었으나 이 때에 이르러 양전사업을 맡을 새로운 독립기구로서 양지아문(量地衙門)이 설치되었다. 양지아문에서는 1899년 여름부터 양전을 담당할 실무진으로서 양무감리(量務監理)와 양무위원이 임명됨에 따라 여러 곳에서 동시에 양전이 실시되었다.

1901년 흉년으로 양전사업이 일단 중단될 때까지 양지아문에서 양전을 끝낸 지역은 전국의 331군 가운데 경기 15군, 충북 17군, 충남 22군, 전북 14군, 전남 16군, 경북 27군, 경남 10군, 황해 3군으로서 모두 124군이었다.

양지아문의 양전사업이 일단 중단된 뒤 1901년 10월 새로운 기구로서 지계아문(地契衙門)이 설립되었다. 지계아문에서는 지계 발행을 위한 사업에 착수하면서, 사업의 성격상 1902년 3월 양지아문의 기구를 지계아문에 통합시키게 되었다.

양지아문에 이어서 지계아문이 양전을 시행한 군은 경기 6, 충남 16, 전북 12, 경북 14, 경남 21, 강원도 26군으로 모두 94군이었다. 조선 말기의 광무 양안에 이르기까지도 토지를 결부법으로 파악한다는 사실과 전품을 6등화한다는 종래의 양전 원칙을 그대로 준수, 적용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양전은 법제적으로 20년 1차의 시행이 어려웠다. 그것은 대사업일 뿐만 아니라 여러 국내외적인 어려운 여건도 시행에 불편을 주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
『만기요람(萬機要覽)』
『조선후기농업사연구』(김용섭, 일조각, 1974)
『조선전기토지제도사연구』(김태영, 지식산업사, 1983)
『조선근대농업사연구』(김용섭, 일조각, 1984)
「한국토지제도사」 하(천관우, 『한국문화사대계』 Ⅱ,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1965)
「이조전세(田稅)제도의 성립과정」(박시형, 『진단학보』 14, 1940)
「16세기 양전(量田)과 진전수세(陳田收稅)」(이재룡, 『손보기박사정년기념한국사학논총(孫寶基博士停年紀念韓國史學論叢)』, 1988)
「숙종대 양전(量田)의 추이와 경자황안(庚子黃案)의 성격」(오인택, 『부산사학』 23, 1992)
「숙종조 방전법(方田法) 시행의 역사적 성격」(최윤오, 『국사관논총』 38, 1992)
집필자
이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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