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경작하는 것을 일컫는 정전(正田)과 대칭되는 뜻으로 쓰였다.
농업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면에서 볼 때, 고려시대에는 휴한경(休閑耕)이 보편적이어서 1년간 휴한의 것을 일역전(一易田), 2년간 휴한의 것을 재역전(再易田)이라 칭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 농법 수준은 대체적으로 상경(常耕)의 연작농업(連作農業)이 보편화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개국 초부터 상경 농지의 진황(陳荒)은 금하는 한편, 무고하게 계속 진황시키는 경우 그 농지를 타인에게 개급(改給)한다는 원칙을 지켜오고 있었다.
그 같은 생산력 수준을 바탕으로 세종 때 공법(貢法)수세제를 마련해 가는 과정에서, 정전을 전안(田案)에다 등재한 뒤, 혹 경작하며 혹 묵히기도 하는 것을 거기에 잇대어 속록(續錄)한다는 뜻으로 속전이란 용어를 쓰게 되었다.
즉 농지 일반의 상경화를 전제함에 따라 이에 아직도 휴한경으로 남아 있는 것을 속전이라 칭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공법수세제는 정전의 진황은 불허하여 모두 수세키로 하고, 속전의 진황은 수령·관찰사의 심사 보고를 거쳐 면세한다고 규정하였다.
나아가 ≪경국대전≫에 속전은 기경(起耕)하는대로 수세한다 했으며, 또 속전이라 하더라도 토질이 비옥해 생산량이 아주 많은 것은 수령이 장부에 기록해두고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다음 양전 때 정전으로 바로잡는다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공법수세제에서의 전분(田分) 등급은 토지 생산력의 실제보다 높게 책정된 경우가 많아 정전의 진황이 빈번하게 야기되고 있었다.
때문에 16세기이래 이를 속전으로 강등시켜 수세하자는 논의가 계속 전개되었고, 18세기에 가서는 그러한 조처를 취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농지를 강속전(降續田)이라 하였다.
속전은 기경하는 대로 수세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실상은 18세기 말까지도 속전에서의 백징(白徵)이 전정(田政)의 가장 큰 폐단의 하나인 것으로 누누이 논란되고 있었다. 또한 원칙대로 수세하는 경우에도 그 세액은 정전의 경우보다 결코 경감하지 않는 것이 법례로 지켜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