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고려시대의 적전이었는데, 조선 태종 때 국왕의 친경(親耕) 의례를 위해 신왕조의 수도인 한성(漢城)의 흥인문 밖에 새로 적전을 설치함에 따라 전자를 서적전, 후자를 동적전이라 칭하게 되었다.
그 뒤 국왕의 친경은 동적전에서만 단속적으로 거행되었으며, 또 종묘·사직 등에 공궤하는 자성(粢盛 : 국가의 큰 제사에 쓰는 차기장과 메기장)도 동적전에서의 수확으로써만 충당하게 되었으므로, 서적전의 것은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의 국고로 귀속하도록 법제화하였다.
서적전의 규모는 태종 때 300결(結)이었으나, 그 20여 년 후인 세종 때의 양전결과로는 단지 70결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는 조관(朝官)이라든가 개성주민들의 침점에 따라 일어난 일이었다. 중종 때 경차관을 파견하여 이를 추심한 바 있으나, 이미 누대 상속·매매를 거쳐 민전화한 지 오랜 이들 토지에서의 민원을 고려하여 환급하고 말았다.
조선 후기의『만기요람(萬機要覽)』에 나타난 서적전의 규모는 65결 99부 9속으로 되어 있다. 그 경영은 원래 전농시(典農寺) 소속의 노비를 동원하여 직영하였으나, 세종 때 이후 풍덕(豊德) 등 부근의 농민을 동원하여 경작하게 하고, 이것이『경국대전』에도 법제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