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과 예성강을 이용하는 수운(水運)을 통해 조세곡(租稅穀)을 서울로 운반하던 수부(조세로 거둔 곡식을 운반하던 하급 선원)들에게 지급된 직역전(職役田)으로서의 수조지(收租地)이었다.
조세곡의 운반에는 해운·수운 및 육운의 3가지 방법이 고려시대부터 운용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 왜구의 창궐로 마비되었다가, 공양왕 때부터 복구되기 시작해 조선시대에 다시 제도화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한강·예성강 연변에 가까운 경기도·충청도·경상도·강원도·황해도 각 고을의 조세곡을 서울로 운반하기 위해 충주의 가흥창(可興倉), 원주의 흥원창(興原倉), 춘천의 소양강창(昭陽江倉), 배천(白川)의 금곡포창(金谷浦倉)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충주에다 좌수참(左水站)을 두어 좌도수운판관(左道水運判官)의 지휘 하에 306명의 수부를, 배천에다 우수참을 두어 우도수운판관의 지휘 하에 292명의 수부를 각기 배속시켜 위의 각 창에 수집된 조세곡을 서울로 운반하게 하였다.
수부전은 원래 1인 2결(結)씩 절급했으나, 1445년(세종 27) 국용전제(國用田制)의 실시에 따라 1결 50부(負)씩으로 감축되고, 다시『경국대전』에는 1결 35부씩으로 규정되었다. 이는 과전법 체제의 전개 과정에서 일어난 현상으로서, 수조권적 토지 지배 관계의 퇴화 현상이자, 직역전 제도가 소멸해 가는 현상의 하나였다.
수부전은 민전(民田) 위에 절급된 이른바 각자수세의 토지였으니, 곧 그 토지의 조세가 국가에 납입되지 않고 수부들이 스스로 거두어 갖도록 규정된 토지였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서 말기로 가면서 조세곡의 작목(作木 : 전세를 무명으로 환산해 받음.)·작전(作錢 : 전세를 돈으로 환산해 받음.) 현상이 커짐에 따라 수참 제도와 수운 제도가 혁파되었고, 수부전 또한 혁파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