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계아문 ()

근대사
제도
1901년 대한제국 정부가 토지소유자의 권리를 법적으로 증명하는 지계(地契)를 발급할 목적으로 설립한 부서.
정의
1901년 대한제국 정부가 토지소유자의 권리를 법적으로 증명하는 지계(地契)를 발급할 목적으로 설립한 부서.
개설

1901년 대한제국 정부는 지주 중심의 근대적 개혁을 위한 기초사업으로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기 위해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했으나, 이후 양전(量田)과 함께 토지소유권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지계(地契) 발행의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어 지계아문을 신설하였다.

변천과 현황

1901년 대한제국 정부가 지주 중심의 근대적 개혁을 위한 기초사업으로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기 위해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했다가 양전(量田)과 함께 토지소유권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지계(地契) 발행의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어 신설한 부서이다.

1901년 중추원의관 김중환(金重煥)이 토지소유권의 이전을 법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지계의 발행이 급선무라는 내용의 소를 올렸고, 같은 해 10월 20일 의정부참정 김성근(金聲根)이 「지계아문직원급처무규정(地契衙門職員及處務規程)」을 작성하여 주의(奏議)하고, 같은 날 칙령 제21호로 공포되었다.

소속직원은 초기에는 총재관(總裁官) 1인, 부총재관 2인, 칙임(勅任)과 판임(判任)의 대우 각 4인씩 모두 8인의 위원, 그밖에 기수(技手) 2인이었다. 13도에는 감리(監理) 각 1인을 파송하였는데, 각 지방관을 임시감리로 임명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11월 소속 관리를 개편하여, 칙임 1등의 총재 1인, 칙임의 부총재 3인, 주임(奏任) 6등의 감리 13인, 주임 또는 판임(判任)의 위원 4인, 판임의 주사(主事) 6인을 두었다. 그리고 문서과·서무과·회계과 등의 분과를 설치하였다.

1902년 3월 기존의 양지아문과 업무상 중첩되는 부분이 발생하자, 양지아문을 지계아문에 통합시켰다. 이때 양지아문의 총재관·부총재관·양무감리(量務監理) 등은 해임되었으나 그 밖의 모든 기구는 그대로 지계아문의 지휘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결과 지계아문은 지계발행사업 뿐만 아니라 양지아문이 담당하던 양전사업까지 수행하였다.

1904년 러시아와 일본 간에 전쟁 위기가 가속화되자, 대한제국은 양국에 대한 중립을 선언하는 한편, 정부기구의 전면적 재검토를 통한 긴축재정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의 일환으로 이해 4월 19일 반포된 칙령 제11호에 의해 지계아문은 탁지부에 편입되었고, 사업은 탁지부 양지국(量地局)에 계승되었다.

내용

1901년 공포된 칙령 제21호에 의하면, 지계아문의 담당한 사무는 한성부와 13도 각 군에 있는 전토(田土)의 계권(契券)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조사대상을 농지인 전토뿐만 아니라 산림·토지·전답·가사(家舍)까지 확대하였고 개항장이 아닌 곳에 있는 외국인의 토지소유는 인정하지 않았다.

지계아문의 하위부서는 문서과, 서무과, 회계과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문서과는 기밀에 관한 사항, 관리의 신분에 관한 사항, 공문서 작성 등을 맡고, 서무과는 공문의 접수와 발송, 통계조사보고, 공문서의 편찬과 보존, 지권도서 간행과 관리를 담당했으며, 회계과는 아문의 소관경비 및 제수입의 예결산회계, 아문소관의 재산 및 물품관리에 관한 사항 등을 맡았다.

지계아문이 양전사업을 맡은 이후 양전을 실시한 군은 경기도 6개, 충청남도 16개, 전라북도 12개, 경상북도 14개, 경상남도 20개, 강원도 26개군으로 총 94개군이었다. 따라서 앞서 양지아문에서 시행한 것을 합하면 총 218개군으로 전국의 3분의 2에 해당했다.

그러나 1904년 4월 지계아문은 탁지부 양지국(量地局)으로 축소, 편성되었다. 이 때는 러일전쟁의 전후시기로 새로운 사업을 추진할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양지국은 단지 그동안 지계아문의 뒤처리를 담당하는 데에 국한되었고,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인정하지 않는 지계사업이 일본인의 이해와 상반되면서 지계의 발행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의의와 평가

지계아문의 핵심은 종전의 모든 매매 문기를 강제로 거둬들이고 새로운 관계(官契)를 발급함으로써 국가가 토지 소유권을 공인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국가가 자기 영토 안의 부동산에 대해 소유권의 등록·이전, 그 밖의 관련사항들을 통제·장악할 강제규정을 마련했음을 의미한다. 특히 토지 매매나 양여·전당의 경우 관청의 허가를 받도록 함으로써 당시 큰 문제를 야기하고 있던 외국인의 토지 침탈을 저지한 점과, 경작자가 누려온 권리들을 보호하려는 정책이 취해진 점은 주목된다.

반면 이 사업은 일본의 러일전쟁 도발과 조선보호국화 정책에 밀려 끝내 중단되고 말았고 그 결과 근대법적인 토지조사는 1912년 이후 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토지조사사업’이란 이름으로 강제되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일성록(日省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지계아문내문(地契衙門來文)』
『관보(官報)』
『측량 및 지형공간정보 백서』(건설교통부 국립지리원, 2003)
『한국근대농업사연구(韓國近代農業史硏究)』(김용섭, 일조각, 1975)
「상공업의 변화와 농업의 변동」(유승렬,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한국사연구입문)』 하, 한국사연구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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