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보국회가 설립되기 전인 1905년에 캘리포니아주 파사디나에서 대동교육회가 조직되었다. 회장에 김우제, 총무에 장경이 선출되었다. 이 회는 교육진흥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나 본래의 의도는 안창호(安昌浩)의 공립협회(共立協會)에 대항하는데 있었다.
이 회의 중심 인물이었던 장경은 1903년 9월 안창호의 지도로 조직된 상항친목회(桑港親睦會)의 발기인이었다. 친목회가 1905년 4월 공립협회로 바뀌어진 뒤 안창호와 장경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장경이 중심이 되어 공립협회에서 분리, 대동교육회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대동교육회는 교육진흥에만 목적을 둔 까닭에 공립협회의 정치적 운동에 비해 활동이 미약하였다. 이 때문에 1907년 3월, 일제의 국권침탈이 강화되고 있던 시대적 상황에 부응해 정치적 운동을 지향하면서 대동보국회로 확대, 개편되었다.
설립 취지는 동지의 단결과 민지(民智)의 계발에 있었다. 조직은 중앙회와 지방회로 나누어 운영하였다. 샌프란시스코 웹스트가에 중앙총회관을 두고 스탁톤 · 푸레스노 · 칼린 · 덴버 · 솔트 레이크시티 등의 다섯 지역에 지방회를 설치하였다.
초대 중앙회장으로 이병호가, 중앙총무에는 장경이 선임되었으며, 백일규 · 문양목 등도 회장을 역임하였다. 1907년 9월 24일 중앙총무인 장경은 지회의 설립을 목적으로 중국 상해(上海)로 출발, 11월 24일 상해 애이근로(愛以近路) 균익리(均益里) 5가 114호에 상해지회를 설립하였다.
1908년 3월 21일 일제에 의해 한국외부고문으로 나왔던 미국인 스티븐스(Stevens, D. W.)가 워싱턴으로 가는 도중 샌프란시스코에 들러 일제의 보호정치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에 교민들은 공동회를 개최하고 총대위원(總大委員) 문양목 등이 스티븐스를 방문, 항의하였다. 그러나 그가 계속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자 이 회의 회원이던 장인환은 3월 23일 그를 저격하였다.
1910년 2월 대동보국회는 국민회와 통합되어 발전적으로 해체되었으며, 대동보국회와 국민회의 통합체로서 대한인국민회가 출범하였다.
기관지로는 1907년 10월 3일부터 간행된 『대동공보(大同公報)』가 있었다. 처음에는 석판을 사용해 인쇄해오다가 같은 해 11월 21일부터는 국문활판으로 바꾸었다. 사장에는 문양목, 주필은 최영만(崔永萬)이었다. →대한인국민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