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규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대한인국민회에서 『신한민보』와 『국민보』의 주필로 활동한 언론인 · 독립운동가.
이칭
약산
이칭
백일규(白一圭), 백일규(白日奎)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0년(고종 17)
사망 연도
1962년
출생지
평안남도 증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대한인국민회에서 『신한민보』와 『국민보』의 주필로 활동한 언론인 · 독립운동가.
개설

호는 약산. 일명 백일규(白一圭), 백일규(白日奎). 평안남도 증산 출신. 1905년 5월 하와이로 이민, 그 다음 해 8월 미국 본토로 가서 공부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7년 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를 창립할 때 장경(張景) 등 20여 명과 발기인이 되어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섰다. 1908년 3월 친일미국인 스티븐스(Stevens, D. W.) 사살의거가 발생한 뒤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 두 의사의 후원회 회장으로 선임되어 재판과 사식차입 등 물심양면으로의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1909년 7월 네브래스카에서 박용만(朴容萬)과 함께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 운영하면서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8년 6월 캘리포니아대학 경제과를 졸업하고 문학사가 된 이래 그해 8월 8일 북미대한인국민회의 『신한민보』 주필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뎠다.

이후 16년 동안 신문편집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중국 상해(上海)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군자금 30만 달러를 조달하여 활기를 불어넣었다. 1926년 2월에 북미대한인국민회 총회장에 선임된 이래 8년 동안을 봉직하였다.

1946년 8월 하와이대한인국민회의 『국민보』 주필로 임명되어 편집에 진력하였다. 그 뒤 하와이에서 다시 미국 본토로 온 이후 북미대한인국민회 중앙감찰위원으로 봉직하였다. 저서로 『한국경제사』(1920)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9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재미한인사략』(노재연, 1965)
『한국독립운동사』 1(국사편찬위원회, 1965)
『재미한인오십년사』(김원용, 1959)
집필자
이현희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