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일명 정명희(鄭明熙)·강동욱(姜東郁)·여순지(呂順之)·강화조(姜華祖). 호는 창산(蒼山). 평안북도 창성 출신. 아버지는 강시홍(姜時洪)이다.
1919년 3·1운동 때 향리에서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 뒤 상해로 망명하여 1922년에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 기자로 활약하였고, 1924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회계 검사원과 검사관을 거쳐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었다. 1925년 3월 독립운동 자금 공급과 위임통치 문제로 물의를 일으킨 임시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탄핵안을 결의하였다.
1925년 임시정부 내무부의 참사 겸 경무국장서리에 취임하고, 노병회(勞兵會) 이사에 선임되었다. 1926년나창헌(羅昌憲)·고준택(高俊澤) 등과 협의하여 임시정부의 전위 활동 부대인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산하 단체로 40명 규모의 정위단(正衛團)을 조직한 뒤 총무 겸 전략 참모로 활약하였다. 병인의용대의 활동으로 상해 한국 동포 사회의 치안은 확보되고 일제의 앞잡이들은 거의 근절되어 임시정부의 권위는 크게 제고되었다. 이때 제3차 개선이 이루어졌다.
1928년에 장쑤성[江蘇省] 경찰학교의 교관을 지냈고 1930년에는 안창호(安昌浩)·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 등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하는 데 참여하였다. 그리고 최병선과 같이 일본 총영사관을 습격, 최동윤(崔東允)을 총살하였다.
1930년에는 상해에 있는 프랑스 정보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았고, 1932년에는 상해 둥난대학[東南大學]을 3년 중퇴한 뒤 장쑤성정부 민정청 경무 고문으로 초빙되었다. 1934년 병인의용대장에 선임되고 한국독립당 중앙이사 겸 조사 부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한국독립당·의열단(義烈團)·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미주대한인독립당(美洲大韓人獨立黨) 등 5개 단체를 통합하여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조직하는데 참여하며, 중앙위원 겸 조사 부장에 피선되었다. 1937년양기탁(梁起鐸)·유동열(柳東說)·지청천(池靑天)·현익철(玄益哲)·최동오(崔東旿) 등과 같이 조선혁명당을 조직하고 중앙감찰위원에 선임되었다.
중일전쟁 발발 후 임시정부가 일본군의 중국 침입으로 근거지를 상해에서 전장[鎭江]·창사[長沙] 등지로 이동하던 당시 창사에서 임시정부의 내분으로 야기된 창사사건[長沙事件]으로 한때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그 뒤 중화민국 군사 위원회 정보부 심사 과장에 취임하고, 1945년홍진(洪震)·유동열·이연호(李然皓) 등과 같이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을 조직하고 그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8월 광복 후 귀국하였다.
1963년 독립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