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강석룡(姜錫龍). 함경남도 이원 출생.
1911년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김구(金九) 등과 같이 붙잡혀 황해도 해주형무소에서 복역한 바 있으며, 향리에서 3·1운동을 주동하여 고문을 받은 바 있다.
이어 강태동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가서 독립운동대열에 주도적으로 가담, 내무차장이 되었다.
상해에 와 있던 원로고문 김가진(金嘉鎭)을 설득, 비밀항일결사인 대동단(大同團)의 단장으로 취임하도록 적극 주선하였으며, 자신도 비밀대동단원으로 국내외를 연결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의 밀서를 받아가지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연락원 이종욱(李鍾郁)과 같이 은밀히 입국하여 대동단의 전협(全協)에게 전달하였다. 이때 띠고 온 사명은 의친왕(義親王: 李堈)을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모셔가는 것이었다.
의친왕을 상해로 탈출시키는 데 있어서 김춘기(金春基)와 같이 한때 정남용(鄭南用)·김중옥(金中玉)·나창헌(羅昌憲)·이을규(李乙奎)와 마찰을 일으켰다. 이로 인하여 전협일행으로부터 결박을 당해 갇히기도 하였다.
의친왕은 1919년 11월 9일 이천만동포에게 보낼 유고문(諭告文)을 집필하고 수색역에서 상복으로 위장 경의선 철도를 이용, 안동으로 가던 도중,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전협·한기동(韓基東)·송세호(宋世浩)·이신애(李信愛)·이을규 등과 같이 1920년 1월을 전후로 체포, 실형을 선고받았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