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창성 출신. 1919년 3·1운동 때 이승훈(李昇薰)의 밀명을 받아 창성군의 거사 책임을 맡았다. 4월 1일 창성군에서 2,000여 군중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부상을 입어 다음 날인 4월 2일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후 만주의 관전현(寬甸縣)향로구(香爐溝)와 유하현(柳河縣)삼원보(三源堡) 및 안동현(安東縣) 등지를 내왕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평안북도창성군 조사원으로 임명되어 창성군의 유력자·재산가·학교·종교 등을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1920년 1월 12일에는 임정과 국내 각 지방과의 비밀연락기관인 동시에 임정의 국내 지방행정기관인 연통제(聯通制)가 조직되자 창성군의 군감(郡監)에 임명되어 국내외를 행정적으로 연결하는 업무를 위임받았다.
이때 강창을(姜昌乙)·선우황(鮮于晃)·강제은(康濟殷)·강이달(姜利達)·강용철(姜容澈)·김홍빈(金洪斌) 등 수십 명을 창성군의 연통제 조직원으로 가입시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아울러 임정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창성군일대를 순회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면서, 임정에서 발간한 『독립신문(獨立新聞)』이나 『한일관계사(韓日關係史)』 등을 국내에 배포하였다.
약 2년간의 활동은 창성 출신 이용익의 밀고로 군내 지하 독립투쟁을 하던 300여 명이 피검되어 종언을 맞이하였다. 강제희는 이때 북만주로 망명하였으며, 이후 북만의 한교회장(韓僑會長)이 되었다. 그리고 동녕(東寧)·목릉(穆稜)·밀산(密山) 등지에서 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강제희의 공을 기리어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