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칭은 재상해한인공제회(在上海韓人共濟會)이다.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한 신규식(申圭植)은 손문(孫文)의 동맹회에 가입, 신해혁명에 참가해 중국 측 요인들과 긴밀한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청국 정부와 중국주재 일본영사가 그를 체포하려 하자 상해의 프랑스인 거주지로 도피하였다. 당시 상해에는 한국에서 망명한 독립운동가와 일본에서 건너온 한국인 유학생들이 많았다. 신규식은 이들을 규합, 이듬 해 7월 이 단체를 조직했는데, 표면적으로는 상해 거류 한인의 상조기관처럼 활동했으나 실제 목적은 독립운동이었다.
이사장에 신규식, 총재에 박은식(朴殷植)이 선출되었다. 그 밖의 중견 간부는 김규식(金奎植) · 신채호(申采浩) · 홍명희(洪命熹) · 조소앙(趙素昻) · 문일평(文一平) · 박찬익(朴贊翊) · 조성환(曺成煥) · 신건식(申健植) · 김용호(金容鎬) · 신철(申澈) · 민제호(閔濟鎬) · 김갑(金甲) · 정환범(鄭桓範) · 김용준(金容俊) · 민충식(閔忠植) · 이찬영(李贊永) · 김영무(金永武) · 이광(李光) · 신석우(申錫雨) · 한진산(韓震山) · 김승(金昇) · 김덕(金德) · 변영만(卞榮晩) · 윤보선(尹潽善) · 민병호(閔丙鎬) 등이었다.
회원은 300여 명에 달하였고, 구미 각지에 사무실을 만들어 활동하였다. 그 뒤 중국의 혁명 지도자들과 보다 깊은 관계를 유지코자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조직, 중국 국민당과 사회 저명인사 중 송교인(宋敎仁) · 진기미(陳其美) · 호한민(胡漢民) · 당소의(唐紹儀) · 진과부(陳果夫) 등을 가입시켜 독립운동에 중국인의 지지를 받고자 노력하였다. 1913년 12월에는 독립운동을 담당할 청년들을 교육하기 위해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였다.
1917년 8월에 잠시 조선사회당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당시 스톡홀름에서 국제사회주의자대회(이칭: 만국사회당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있자, 사회주의세력이 주도하는 국제회의에 능동적으로 참여해 한국의 독립을 촉구할 목적으로 신규식 등이 발의해 ‘조선사회당’이란 명칭을 쓴 것이다. 1918년 말 조직된 신한청년단에 동제사 소장파라 할 여운형, 선우혁, 서병호, 조동호 등이 참여하였다. 동제사와 신한청년단은 긴밀한 협력관계를 갖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상해에서 조직된 최초의 한국인 독립운동 단체로서, 1919년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상해 한국인의 중심 조직으로 그 역할을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