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소운(少雲). 일명 민우명(閔禹明). 서울 출신.
서울 경신학교(儆新學校)를 졸업하고 한성영어학교(漢城英語學校)에서 수학중 1910년 한국이 일본에 강점되자 1912년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갔다. 신규식(申圭植)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대한민국청년단에도 가입, 재무부장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4월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여운형(呂運亨) 등과 같이 제2차의정원회의에 참석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그 해 5월 2일 재원염출 방침에 대한 각 지방의원의 의견을 들은 임시의정원회의에서는 구급의연금과 인두세(人頭稅) 모집, 내외에 공채 모집 등의 방법을 가결하였다.
그 뒤 각 지방에서 우선 구급의연금 모집위원 3명씩을 선거하여 업무를 수행하게 할 때, 여운형·박희선(朴熙善)과 함께 경기도 대표가 되었다. 이후 대한적십자회의 회원 모집활동에도 종사하였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참사(參事)와 외사국장(外事局長) 등을 역임하였다.
1923년에는 김상옥(金相玉)의 귀국을 주선,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최초로 시가전을 전개하도록 뒷받침해 주었다. 같은 해 상해 교민단의 서구위원(西歐委員)으로, 임시정부 외곽단체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으며, 그 뒤 여러 차례 임시의정원 의원을 역임하였다.
1932년 이봉창(李奉昌)과 윤봉길(尹奉吉)의 의거 후 검거 위협을 받고 항저우[杭州]로 피신,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