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명은 박정일(濮精一) · 박창익(朴昌益) · 박순(濮純). 호는 남파(南坡). 경기도 파주 출신이다.
1904년 관립상공학교(官立商工學校)에 재학 중 국권회복을 위한 모의를 여러 차례 하다가 발각되어 퇴학당하였다. 1907년에 조직한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1908년 4월 관립공업전습소(官立工業專習所)에 입학하여 1910년에 졸업하였다.
이 때 나라가 일제에 강점당하자 박승익(朴勝益) 등 10여 명과 함께 저항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그 해 겨울 만주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였다. 북간도에서 이상설(李相卨) · 백순(白純) 등의 지도로 독립투쟁을 계획하는 한편, 대종교 도사교(都司敎) 나철(羅喆)의 권유로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12년에는 중국 관헌의 지원을 얻어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 청파동(靑坡洞)에 한국인 학교를 설치하고 애국사상과 자립사상을 고취하였다. 동시에 대종교의 정교직을 맡아보면서 포교에도 힘썼다.
1915년 중국인 교육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이 심해 북간도를 떠나 길림(吉林)으로 피신했다가 상해로 갔다. 상해에서 신규식(申圭植)과 제휴하여 동제사(同濟社)를 창설하고 노령(露領)의 동지와 긴밀하게 연락하였다.
1918년 12월 조소앙(趙素昻) · 김좌진(金佐鎭) 등 39인의 명의로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지자, 이동녕(李東寧) · 이시영(李始榮) · 조소앙 등 30여 인과 함께 참여하였다. 임시의정원의원으로 활약하면서 임시정부 육성에 진력하였다.
또한 서울에서 1919년 4월에 조직된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에 박은식(朴殷植) · 신채호(申采浩) 등과 같이 평정관(評政官)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19년 8월 정의단(正義團)이 서일(徐一) 중심으로 대한군정부로 개편되었을 때 외교처장직을 겸임하였다. 또 임시정부와 연계를 강화하며 대한군정서로 확대 개편하는 데 일조하였다.
1921년 7월 임시정부 외무부 외사국장(外事局長) 겸 외무차장 대리로 외교업무를 전담, 대중외교에 전념하였다. 당시 외무총장 신규식이 국무총리를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박찬익이 외교업무를 대행했던 것이다.
그 해 8월에는 안창호(安昌浩)와 같이 재정적으로 궁핍해진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조직, 의연금 모금에 노력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1921년 11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9개 국이 참가한 워싱턴 태평양회의가 열렸을 때, 임시정부에서 조직한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의 간사로 선임되어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그 해 11월 신규식이 중국 호법정부(護法政府)에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외교공세를 펼 때 박찬익이 부사(副使)로 활동하여 중국 호법정부 총통 손문(孫文)으로부터 임시정부 승인을 받아냈다.
1922년 9월에 신규식이 죽자 동제사 이사장이 되어 한중합작 항일운동을 전개했고, 1932년 윤봉길(尹奉吉)의 의거로 임시정부가 위기에 처하자 이동녕 · 김구(金九)를 도피시켰다.
1933년 5월 김구와 같이 난징중앙군관학교[南京中央軍官學校] 구내에서 장개석(蔣介石)과 면담하여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게 하여 한국인 청년을 입교시켜 군간부의 양성에 기여하였다.
1940년 임시정부를 충칭[重慶]으로 이전시키고 10월 국무위원이 되었다. 1945년에는 임시정부 주화대표단 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