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식(申圭植) 등이 신해혁명 후 주로 중국인 지사들을 망라해 조직하였다.
이보다 먼저 박은식(朴殷植)·김규식(金奎植)·신규식·신채호(申采浩)·조소앙(趙素昻)·문일평(文一平)·박찬익(朴贊翊)·조성환(曺成煥)·신건식(申健植)·김용호(金容鎬)·신철(申澈)·민제호(閔濟鎬)·민필호(閔弼鎬)·김갑(金甲)·정환범(鄭桓範)·김용준(金容俊)·민충식(閔忠植)·이찬영(李贊永)·김영무(金英武)·이광(李光)·신석우(申錫雨)·한진산(韓震山)·김승(金昇)·김덕(金德)·신상무(申相武) 등 30여 명이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한 바 있다.
이 후 한국과 중국의 혁명지사를 서로 연결하고 두 국민 사이의 우의와 친선을 도모하면서 동시에 한국의 독립을 촉진시키기 위해 이 신아동제사를 조직한 것이다. 동제사는 이 단체를 기반으로 하여 중국 안에서 한국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신아동제사에 참가한 인사들 중 중국인은 국민당의 중진 인사들이었다. 당시 사회의 저명인사는 송교인(宋敎仁)·진영사(陳英士, 일명 其美)·호한민(胡漢民)·대계도(戴季陶)·요중개(廖仲凱)·추로(鄒魯)·서겸(徐謙)·장부천(張溥泉)·굴영광(屈映光)·오철성(吳鐵城)·은여려(殷汝驪)·장계란(張季鸞)·호로(胡露)·백문울(柏文蔚)·여천민(呂天民)·당소의(唐紹儀)·당노원(唐露園)·황개민(黃介民)·양춘시(梁春時)·진과부(陳果夫)·장정강(張靜江) 등 30여 명에 달하였다.
문인으로 굳센 기개가 있던 신규식은 주집신(朱執信) 등 당시 상하이에 머물고 있던 유력한 중국 혁명인사를 찾아다니면서 독립운동에 필요한 전술 전략을 습득하고 군수물자 등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남사(南社) 등과 같이 신아동제사는 중국의 혁명인사들이 한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직접·간접으로 협조했던 1910년대 초의 최대의 결사였다.
이것이 기반이 되어 1919년 4월 13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租界) 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식으로 수립, 선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규식이 세상을 떠난 뒤 신아동제사는 사실상 해산되다시피 하여 중국 인사들은 다른 형태로 한국을 지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