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2월 16일 대구광문사(大邱廣文社) 사장 김광제(金光濟), 부사장 서상돈(徐相敦) 등이 특별회를 개최하여 대구광문사를 확대, 개편하는 과정에서 개칭된 것이다.
회장에 박해령(朴海齡), 부회장에 김광제가 선출되었다.
회원으로는 서상돈·장상철(張相轍)·강영주(姜永周)·심정섭(沈廷燮)·김우근(金遇根)·서병오(徐丙五)·윤하선(尹夏璿)·정재덕(鄭在德)·이종정(李鍾楨)·길영수(吉永洙)·이우열(李遇烈)·강신규(姜信圭)·정규옥(鄭圭鈺)·추교정(秋敎廷) 등이 참가하였다.
특별회를 마친 뒤 서상돈이 당시 일본으로부터 비싼 이자로 들여온 국채가 1,300만원에 이른다고 하며, 국고금으로 이를 모두 갚지 못할 터이니 2천만 전국민이 담배를 석달만 끊고 매달 20전씩 모아 빚을 갚아보자고 하였다.
그의 주장에 참가 회원 모두가 동의했는데, 먼저 김광제가 당장 실시하겠다며 연죽(烟竹)·초갑(草匣)을 없애고 석달간의 담배값 60전과 돈 10원을 내놓자, 참석자 전원이 그 자리에서 성금을 내어 2,000여 원이 모금되었다.
이들은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해 각 지방에 발송했으며, 2월 21일대구 북후정(北後亭)에서 국채보상모금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고 대구 서문 밖 수창사(壽昌社)에 국채지원금 수합사무소를 설치하였다.
그 뒤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2월 22일 서울에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가 설치되었다. 이에 각종 신문이 적극 호응했으며, 각 지방에서도 취지를 같이하는 단체가 수없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한 민족적 단결에 불안을 느낀 일제의 탄압으로 국채보상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한말의 경제적 민족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은 바로 이 단체가 진원지였다. →국채보상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