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고종 21)의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한 뒤, 국내 개화파의 귀국 요청에 따라 1895년 12월 하순에 귀국한 서재필(徐載弼)은 독립문·독립공원과 함께 자주독립의 상징으로 독립관 건립을 주장하였다.
이에 독립협회는 당시 중국사신을 접대하는 영빈관(迎賓館)으로 사용하여오던 사대(事大)의 상징적 건물로, 갑오경장 이후에는 사용하지 않아 방치되어오던 모화관을 개수하여 독립관이라 부르고, 독립협회의 사무소 및 집회장소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약 2000원 정도의 경비를 소요하여 1897년 5월 개수를 끝내고, 5월 23일 왕태자의 한글로 된 ‘독립관’의 친서 현판식을 거행하였다. 독립협회에서는 독립관을 사무실로 사용함과 동시에 매주 일요일 오후 3시 회원들이 독립관에 모여 견문과 학문에 도움이 되는 강연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강연회가 큰 성과가 없게 되자, 서재필·윤치호(尹致昊) 등은 강연회를 토론회로 바꾸어 운영하기로 하고, 1897년 8월 29일독립관에서 제1회 토론회를 가졌다.
그 뒤 토론회에 참가하는 인원이 증가함에 따라, 그리고 같은 해 12월의 제12회 토론회부터는 길이 멀어 참석자가 내왕하기에 불편할 것을 염려하여, 전경기감영내아(前京畿監營內衙)로 옮겨 개최하였다. 독립관은 한말 열강의 침투 속에서 독립을 이룩하고자 한 독립협회활동의 근거지이자 자주독립의 상징적 건물이었다.
현재의 건물은 1997년에 다시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