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선혁(鮮爀). 평안북도 정주 출신.
1910년 12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총살미수사건이라는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무죄 방면되기까지 심한 고문을 당한 뒤 상해로 망명하였다.
1918년 8월 서병호·여운형·김구(金九)·이광수(李光洙)·안정근(安定根) 등 10명과 같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 운영하고 이사에 취임하였다.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신문보도를 보고 여운형(呂運亨)·장덕수(張德秀) 등과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서병호(徐丙浩)와 함께 국내로 들어와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종용하여 3·1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그 해 3월 하순,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내에 독립사무소를 설치하고, 최창식(崔昌植)·서병호와 함께 현순(玄楯)을 총무로 하여 각국에 독립선언서를 발송하였다.
그 해 4월 10일, 상해에서 제1회 임시의정원회의가 열려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교통차장에 선임되었다. 그 뒤 차장제가 위원제로 고쳐질 때 교통위원이 되었다.
그 해 5월, 여운형·최창식·김태연(金泰淵)·이유필(李裕弼) 등 15명과 같이 상해대한인거류민단(上海大韓人居留民團)을 조직하고 총무에 선출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원과 교포의 생활개선에 전념하였다. 또한, 상해 일대의 교포교육을 자치제로 전환하면서 인성학교(仁成學校)를 확장, 운영하고 구국의식을 고취하였다.
1920년 7월 26일 교민단위원 선거에서 총무에 재선되어 계속 활약하였다. 1923년 6월 3일 반임정을 표명한 국민대표회의의 상해대표 윤해(尹海)가 여러 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저해하려 하자 이를 임시정부의 입장에서 성토, 규탄하였다.
1931년 1월 상해에서 개최된 흥사단(興士團) 제1회 원동대회(遠東大會)의 지도위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안창호(安昌浩) 등과 같이 공평사(公平社)를 창설하고 감사의 일을 맡아 독립운동을 지도하고 독려하였다.
1932년 9월 1일 김두봉(金枓奉)의 후임으로 인성학교 교장이 되어 후진양성에 힘썼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큰 효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1934년 1월 항저우[杭州]로 옮겨가 송병조(宋秉祚)·김두봉·조소앙(趙素昻) 등이 조직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참여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했으며, 『진광(震光)』을 발간, 배포하기도 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