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이후 상해로 망명한 신규식(申圭植)·조성환(曺成煥)·한진교(韓鎭敎)·한흥교(韓興敎)·민충식(閔忠植)·박은식(朴殷植)·조소앙(趙素昻)·진희창(秦熙昌)·조동호(趙東祜) 등은 1910년대 일제의 강점을 벗어날 광복투쟁을 위해 한국인들간의 결사가 필요하다는 데 뜻을 모았다. 그리하여 본부를 신규식의 상해 자택인 프랑스 조계 애인리(愛仁里)에 두고 동제사를 조직한 것이다. 1917년 8월에는 신규식 등의 발의로 상해에서 조선사회당(朝鮮社會黨)이 결성되었다.
마침 1917년 8월경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개최되는 만국사회당대회(萬國社會黨大會)에 대표를 파견하기로 하고 ‘조선사회당’이라는 당명을 사용하였다. 조선사회당 명의로 독립의 당위성과 일제의 한국 불법점령 사실을 알림과 동시에 무효를 선언하도록 선전책자도 만들었다. 만국사회당대회를 3개월 앞두고 신규식은 조소앙을 선임하여 여비와 선전책자를 주고 대회에 파견하였다.
조소앙은 조선사회당의 대외협력부장이란 공식직함을 가지고 그 회의에 참석하였다. 여기에서 조소앙의 웅변과 분위기 조성이 주효해 한국의 독립 문제가 정식의제로 상정, 통과되어 최초의 국제회의에서의 성과를 얻었다.
그 뒤 1919년 4월 13일 상해의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金神父路) 22호에서 임시의정원회의를 거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정식으로 대내외에 수립, 선포되었다.
해외독립투쟁의 본부로서 국제정치 무대의 중심지가 된 상해에서, 조선사회당을 중심으로 한 한국인들의 사회당 활동을 통해 항일독립투쟁은 본궤도에 올려지게 되었다. 임시정부의 상해시대 이후는 소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