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환 ()

조성환
조성환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군무부차장을 역임하였고,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단 조직과 한국광복군 창설에 공헌한 대종교인 · 독립운동가.
이칭
청사(晴簑)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5년(고종 12)
사망 연도
1948년
본관
창녕
출생지
여주(국사편찬위원회)|서울(보훈처 공적 조서)
관련 사건
청산리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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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조성환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군무부차장, 북로군정서 군사부장,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875년(고종 12)에 태어나 1948년 사망했다. 1900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가 1906년 안창호와 양기탁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고 북경의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만주로 돌아가 북로군정서 군사부장에 취임하여 청산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1945년 임시정부 요인과 같이 환국한 뒤 한국장교단장·대한독립촉성회위원장·성균관부총재 등을 역임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군무부차장을 역임하였고,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단 조직과 한국광복군 창설에 공헌한 대종교인 ·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창녕(昌寧). 일명 욱(煜). 호는 청사(晴簑). 서울 출신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0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으나 군부의 부패함을 숙청하려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3년 만에 칙령으로 특사되어 참위(參尉)로 임관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906년 안창호(安昌浩) · 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해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하였다.

1907년 1월 연해주로 망명해 헤이그특사 파견이상설(李相卨)을 원조하였다. 그리고 1908년 노우키에프스크[煙秋]에서 최재형(崔在亨)과 구국 방략을 협의하고 북경으로 가서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그 후 귀국해 민족종교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다.

그 뒤 북경으로 건너가서 북경을 근거지로 간도 · 연해주를 왕래하면서 중국혁명 원로 진기미(陳其美)와 함께 한중공동전선을 형성해, 항일투쟁을 전개할 것을 주창하였다. 1912년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桂太郎]가 중국동북지방( 만주)을 시찰하는 기회를 이용해 암살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체포되어 거제도에 1년간 유형(流刑)되었다. 석방된 뒤 또다시 항일독립운동의 진원지인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망명하였다.

그 뒤 지린성 당국과 교섭해 흑룡강성(黑龍江省) 오운현(烏雲縣)에 약 5, 000호가 거주할 수 있는 농지를 마련하고 항일독립운동의 기지와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려고 기도했으나 러시아혁명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서일(徐一) · 계화(桂和) 등과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할 것을 결의하였다. 상해로 건너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해 군무부차장에 임명되었다. 1919년 4월 10일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에 노령(露領) 대표의원으로 당선되고 군무부위원이 되었다. 또한, 1919년 4월 23일 국내에서 13도대표로 구성된 국민대회에서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가 조직되자 평정관(評政官)으로 피선되었다. 1919년 8월 7일 상해에서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서일 · 현천묵(玄天默) · 김좌진(金佐鎭) 등과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고 12월에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해 군사부장에 취임, 청산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청산리 전쟁 이후 작전상 밀산(密山)으로 이동하여, 전만군사단체(全滿軍事團體)를 통일,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해 부총재를 역임하였다. 당시 러시아의 극동당국 · 동북군벌당국과 군사문제 · 재만한인문제를 교섭하였다.

그 뒤 대종교 총본사전리대판(總本司典理代辦)으로서 제2회 교의회에서 홍범규제(弘範規制)를 수정하고 박찬익(朴贊翊)과 함께 정교가대형호(正敎加大兄號)로 승진하였다. 1925년 대종교의 민족의식과 북로군정서의 정신을 계승해 신민부(新民府)를 조직, 외교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신민부가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자 이 학교의 고문으로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경주하였다.

1925년과 1926년 두 차례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926년 북경에서 북경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北京韓國唯一獨立黨促成會)를 조직하고, 1927년 상해에서 개최된 각지 촉성회연합회 북경대표로 참가하였다.

1931년 임시의정원 경기도위원으로 당선되었고, 1933년에 재선되었으며, 1934년에는 국무위원에 피선되었다. 1936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군무총장으로 봉직하였다. 1937년 한국광복전선(韓國光復戰線)을 결성할 때에는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참가하였다.

1938년 군사학편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군사학을 편수하였다. 1939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피선되었다. 그 해 11월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장으로 시안[西安]에 파견되어 중국정부와 협의해 한국광복군 창설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41년 대원수부(大元帥府)의 막료로 군무부장에 임명되어 다시 최고원수부의 판공처장(辦公處長)으로 임명되었다. 1945년 12월 임시정부 요인과 같이 환국한 뒤 한국장교단장 · 대한독립촉성회위원장 · 성균관부총재 등을 역임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운동사자료집』9∼1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5∼1978)
『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1974)
『독립운동사』3∼10(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1978)
『대종교중광육십년사』(대종교총본사, 1971)
『한국독립운동사』3(국사편찬위원회, 1967)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애국동지원호회, 1956)
『무장독립운동비사』(채근식, 대한민국공보처, 1949)
『朝鮮獨立運動史』Ⅱ(金正明 編, 原書房,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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