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산은 중국 흑룡강성 계서시(鷄西市)에 위치한 항일투쟁지이다. 산에 벌과 꿀이 넘쳐나는 곳이라고 하여 봉밀산(蜂蜜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독립운동에 적합한 곳으로 인식되었다. 1909년 이상설 등의 위탁을 받고 이승희가 토지를 매입하여 조선인을 이주시키고, ‘한흥동(韓興洞)’을 세워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였다. 안창호는 신민회 단원을 파견하여 45만 평을 구입하여 조선인들을 집단 이주시키고 독립군의 군량미와 군자금을 마련하였다. 이후 밀산무관학교, 대한독립단, 대종교 총분사 등이 세워져 독립투쟁 활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밀산현(密山縣)으로 알려진 밀산은 일제강점기에 대표적인 항일 투쟁의 본거지 역할을 하였다. 두만강을 건너 연길에서도 기차를 타고 13시간 이상 이동해야 하는 거리의 밀산은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독립운동가와 여러 단체들이 활약하기 적합 곳으로 인식되었다.
1889년 러시아 연해주에 거주하던 3호의 농민이 당벽진(當壁鎭)으로 이주하여 벼농사를 짓기 시작한 후, 10년이 지난 1899년에 1,000호로 증가하였다. 1909년에 이승희(李承熙, 1847∼1916)는 이상설(李相卨, 1870∼1917) 등의 위탁을 받고 봉밀산 부근의 비옥한 토지 150쌍을 매입하여 100여 호의 조선인을 이주시켜 ‘한흥동(韓興洞)’이라는 마을을 세웠다. “대한제국을 부흥한다.”라는 뜻을 가진 한흥동은 백포자 일대에서 제일 처음 세워진 동네로 ‘고려영’이라고도 불렀다. 이승희는 한민학교를 세우고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지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민약(民約)’을 제정하여 한국인들의 단결을 도모하는 등 한흥동을 한국 독립운동기지로 건설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1938)는 1909년에 신민회(新民會) 단원을 파견하여 십리와(十里洼) 지역의 45만 평에 달하는 광활한 토지를 사들여 러시아 연해주와 조선의 조선인들을 집단 이주시켰다. 북 만주로 이주해간 2천여 명의 조선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이 경작한 농산물은 독립군의 군량미가 되고 수익은 군자금이 되었다. 밀산의 봉밀산을 중심으로 많은 항일 교육기관과 독립투쟁 활동의 근거지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는데, 봉밀산자(蜂密山子)의 밀산무관학교(密山武官學校), 당벽진의 대한독립군단과 대종교 총본사, 지일진(知一鎭)의 밀산부관립학교, 서대림자 굉량촌의 항일회 등이 대표적이다.
안창호를 비롯하여 신채호(申采浩, 1880∼1936), 김좌진(金佐鎭, 1889∼1930), 이범석(李範奭, 1900∼1972), 홍범도(洪範圖, 1868∼1943) 등이 밀산을 기반으로 독립투쟁을 벌이기 위한 준비를 다졌으며, 이러한 활동의 가시적 성과는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등으로 나타났다. 밀산에는 후일 서일(徐一, 1881∼1921) 장군이 마적단에 부하를 잃은 시름을 이기지 못하고 곡기를 끊어 자결했다는 언덕이 당벽진에 남아 있고, 이상설 선생이 세운 한흥동 마을도 남아 있다. 독립군의 군량미를 경작했던 십리와의 조선족 마을 뒷산에 뜻있는 인사들에 의해 ‘항일투쟁유적기념비’가 2009년에 건립되었다.
밀산은 구한말까지 봉밀산(蜂蜜山)이라 불렀다.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하고, “산에 벌[蜂]과 꿀[蜜]이 넘쳐난다.”라고 하여 지명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1899년 청조에 의해 봉밀산 초간국(招墾局)이 설치되면서 밀산 일대에 이민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1908년에 밀산부(密山府)가 되었다가 1913년에 부가 폐지되고 현(縣)이 설치되었다. 1992년부터 인근 계서시 관할의 하급 행정도시가 되었다.
흑룡강성의 동남부 우수리강 유역에 위치한 국경도시이다. 서쪽으로는 계동현, 북쪽으로는 보청현 · 칠대하시, 동쪽으로는 호림시와 접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러시아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피서지로 유명한 동북지역 최대의 흥개호(興凱湖)가 연해 있다. 관내에는 한족, 묘족, 만주족, 장족, 조선족 등 20여 개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밀산진(密山鎭)은 밀산시의 중앙부에 위치하여 밀산의 정치, 경제, 문화, 교통, 관광을 관할하는 중심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