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開拓里)의 계동학교 및 인근의 세동학교, 신동학교가 계동학교를 중심으로 1909년 10월 한민학교로 통합되었다. 얼마 뒤 러시아 당국이 페스트 유행을 구실삼아 한인을 블라디보스토크 외각으로 이주시켰다. 1912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권업회(勸業會) 주도로 양옥 대건물로 신축, 교과목을 확충하여 다시 개교하였다.
이에 따라 1912년 3월 권업회 교육부와 신한촌 한민회가 공동으로 2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양옥 교사를 신축하였는데, 현관 정문과 교실마다 태극문양을 새겨 넣어 민족주의교육을 표방하였다.
교사를 새로 짓는 데 들어간 비용은 총 4,698루불로, 그 가운데 2,000루불은 권업회 부회장 이종호(李鍾浩)와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유언을 남기고 순절한 이범진(李範晋)이 각기 1,000루불씩 기증한 것이다.
교직원은 교장·교감 이하 교사 26명으로, 전학생을 기숙사에 수용하였다. 교과과정은 4년제의 고등소학(高等小學)과 중학 과정으로 되어 있었으나, 성경·윤리·국어·외국어·수학·역사·음악·체육 등 기초 교양과정과 아울러 매학년마다 다양한 실업과목도 이수하도록 되어 있었다.
특히, 민족의식 고취에 중점을 두어 교육을 하였는데, 학생들은 「보국가(保國歌)」·「대한혼(大韓魂)」 ·「국기가(國旗歌)」·「한반도가(韓半島歌)」 등 민족의식 혹은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노래들을 애송하였다.
1937년 연해주에 거주하던 한인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될 때까지 남아 많은 학생들을 배출하였다. 일제에 의한 민족 수난기에 국외 한인사회에서 북간도의 명동학교(明東學校), 서간도의 신흥학교(新興學校)와 더불어 민족주의교육을 실시하던 대표적인 학교 가운데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