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백선 ()

근대사
인물
개항기 때, 유인석 의진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였으나, 군기문란죄로 처형된 의병.
이칭
이칭
김백선(金百先)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896년(고종 33)
출생지
경기도 양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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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개항기 때, 유인석 의진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였으나, 군기문란죄로 처형된 의병.
개설

경기도 양평 출신. 이명은 김백선(金百先). 가난하고 문벌이 변변치 못한 집안 출신으로 학문은 많지 않았으나 기개와 용력이 비상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94년 동학농민군이 지평(砥平)에서 일어나자 동향 사람이던 맹영재(孟英在)와 함께 포수대를 조직, 이를 토벌하였다. 맹영재는 그 공으로 지평군수가 되었다.

이듬해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져 항일 기운이 고조되자, 맹영재를 찾아가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하였다. 이 때 마침 제천에서 이필희(李弼熙)·이춘영(李春永)·안승우(安承禹) 등이 의병을 일으키자, 1896년 1월 휘하 포군 400여 명을 이끌고 합류함으로써 제천의병에 실질적인 전투력을 제공하였다.

이어 같은 달 28일 유인석(柳麟錫)이 제천의병의 지휘를 맡아 부대의 편제를 정할 때 선봉장에 임명되어, 충주성전투 등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3월 27일 가흥(可興)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 진지를 점령하던 중 본진에 요청한 원군이 오지 않아 점령에 실패하고 끝내 패퇴하게 되자, 원군을 보내지 않은 중군장 안승우에게 거세게 항의하였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군기를 문란하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휘하 의병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의진을 동요시켜, 제천의병의 급격한 쇠퇴를 가져오게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의병 내부에서 종종 발생하던 양반 유생과 평민·천민 간의 상하 신분 갈등이 표출된 대표적인 사건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상훈과 추모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기려수필(騎驢隨筆)』
「을미의병기 의병부대 내부의 갈등 요인」(권대웅, 『국사관논총』90, 국사편찬위원회, 2000)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유공자공훈록』 9(국가보훈처, 1991)
『독립운동사자료집』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한국독립사』(김승학, 독립문화사, 1965)
「1895∼1896 제천의병의 사상적 연원과 전개」(김상기, 『백산박성수교수화갑기념논총』, 1991)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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