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부에서 파견한 관비생들이 모여서 만들었는데, 공수학회(共修學會)라고도 불렸다. 사무소는 동경시(東京市) 간다구(神田區)에 두었다. 1904년 황실특파유학생 50명이 동경에 파견되어 동경부립제1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회의 설립연도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들 유학생들에 의해 설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907년 1월 현재 임원으로는 회장 한용(韓溶), 부회장 현석건(玄奭健), 평의원 어윤빈(魚允斌)·조용은(趙鏞殷)·전영작(全永爵)·장홍식(張弘植)·현구(玄榘)·최명환(崔鳴煥), 총무원 김만규(金晩圭)·양치중(楊致中) 등이 활동하였다. 이 밖에 편찬원·번역원·회계원·서기원·서무원 등의 임원을 약간 명씩 두었다.
학회 활동은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으나 국내에서의 국채보상운동에 고무되어 의연금 62원 50전을 모아 송금했으며, 대마도(對馬島)에서 순절한 최익현(崔益鉉)의 정신을 기리는 만사(輓詞)를 지어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국내의 『제국신문(帝國新聞)』에 관비생을 비방하는 글이 게재되자 크게 반발, 이를 수정하게 압력을 가하였다. 기관지 『공수학보(共修學報)』는 1907년 1월 계간으로 창간되어 1908년 초 5호까지 발간되었다.
목차는 찬설(贊說)·강단·논설·학술·학원(學園)·잡찬·회보·사림(詞林) 등의 순으로 되어 있다. 강단·논설에서는 국가론, 성공론, 교육론 등에 관한 내용을 연재하였다. 특히, 박종식(朴琮植)의 <국가의 흥체(興替)는 교육정신에 재함> 같은 글은 이 학회의 신교육구국론을 대변해 주는 내용이다.
학원에서는 동식물·광물·지문학·진화론·위생학·법률·도덕·경영 등 학술에 관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잡찬에서는 국제정세를 소개하고, 부국강병론을 고취할 목적으로 피터 대제(皮得大帝, Pyotr)의 전기를 소개하였다.
1908년 2월 유학생단체들이 대한학회로 통합할 때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1909년 1월 전유학생 통합단체인 대한흥학회로 통합되어 발전적인 해체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