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해관은 전통시대 한중 외교 사행로에 위치한 중국으로 진입하는 관문이다. 만리장성의 동쪽 관문이자 기점으로 유관(?關, ?關)이라고도 한다. 조선의 외교사절이 중국의 수도인 연경(燕京)에 가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자 북경의 안전을 담보로 하는 보루로 인식되었다. 중화와 오랑캐를 구분하는 만리장성을 경계로 안쪽을 관내(關內), 밖을 관외(關外)라고 불렀다. 중국의 제도와 문물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조선 지식인들은 이 관문에 들어서야 중화(中華)의 세계, 즉 문명의 세계로 들어선다고 생각하였다.
중국의 전통적 사상 중 하나였던 화이사상(華夷思想)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문명과 비문명을 구분하는 개념이었다. 중화와 오랑캐를 구분하는 화이(華夷)의 기준을 만리장성으로 삼았다. 발해의 노룡두에서 시작되는 만리장성은 산해관 각산장성(角山長城)과 연산산맥을 넘어 서쪽 사막의 감숙성 가욕관(嘉峪關)까지 약 6,400㎞에 걸쳐 이어지는 거대한 인공 건축물이다.
문명(文明)과 비문명(非文明)으로 대체되는 화이를 가르는 기준이 만리장성이었던 만큼 산해관의 안쪽을 관내(關內), 밖을 관외(關外)라 불렀다. 이 관문을 들어서야 중화(中華)의 세계, 즉 문명의 세계로 들어선다는 관념을 갖고 있었다.
중국을 왕래했던 조선의 외교사절 역시 요동의 사행노정(使行路程)을 경유하여 중국의 수도인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해관을 통과해야 했다.
조선의 사신들에게 산해관은 중국의 규모와 제도를 짐작할 수 있는 상징적인 건축물이었다. 특히 산해관의 관문 중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은 그 위용이 가장 웅장하였으며, 조선 지식인들의 관념 속에 자리 잡은 상징적인 경계(境界)이기도 했다.
1780년 사행에 참여했던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熱河日記)』 일신수필(馹汛隨筆) 산해관기(山海關記)에서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서는 중국의 큼을 모르고, 산해관을 보지 않고서는 중국의 제도를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산해관의 규모와 위용을 평가했다.
산해관은 본래 유관(榆關, 渝關)이라고도 하며, 한대에는 임유관(臨榆關)이라고 했으나 지금의 위치와는 차이가 있다. 임유관은 고구려가 수(隋)를 공략했던 임유관전투(臨榆關戰鬪)의 현장을 말한다. 산해관의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은 변경을 지키는 인후(咽喉)이자 북경의 안전을 담보하는 보루(堡壘)로 인식하였다.
1381년(홍무 14)에 장군 서달(徐達)이 산해위(山海衛)를 세우고 관을 축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에 산해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579년(만력 7)에 척계광(戚繼光) 장군이 관을 보수하면서 바닷속으로 7장(丈)의 석성(石城)을 증축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노룡두(老龍頭)이다.
명 말에 산해관 총병 오삼계(吳三桂)는 농민 반란군 이자성(李自成)을 물리치기 위해 산해관의 성벽을 열어 청군이 무혈입성하게 하였고, 이로 인해 청 제국의 중원 지배가 시작되었다. 곧 명은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청 제국이 열리게 되었다.
산해관은 요령성(遼寧省)과 하북성(河北省)을 가르는 경계(境界)이며, 행정구역상 하북성 진황도시(秦皇島市)에 속한다. 북경에서 약 300㎞ 떨어져 있는데, 서쪽으로는 연산산맥(燕山山脈), 동쪽으로는 발해만(渤海灣)에 연한 군사요충지이다. 아울러 서역의 가욕관에서 요동 발해만에 이르는 만리장성의 동쪽 관문이자 기점(起點)이다.
산해관은 중국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해변 휴양지의 하나이다. 인근의 북대하(北戴河)는 세계적인 해양 휴양 명소로 널리 소개되고 있다. 산해관에는 만리장성의 관문으로서 명대 장성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이 잘 남아 있다.
산해관 천하제일관을 비롯한 동라성(東羅城)과 서라성(西羅城), 영해성(寧海城)의 장대(將臺)인 징해루(澄海樓), 노룡두, 해신묘(海神廟) 등이 고성(古城)의 면모를 잘 갖추고 있다. 산해관 외곽에는 각산장성과 맹강녀묘(孟姜女廟), 장수산(長壽山) 등의 명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