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석 ()

이범석
이범석
정치
인물
일제강점기 때, 고려혁명군 기병대장, 광복군 참모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초대 국무총리, 국방부장관, 참의원 등을 역임한 군인 · 정치인 · 독립운동가.
이칭
철기(鐵驥)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0년(고종 37)
사망 연도
1972년
본관
전주(全州)
출생지
서울
관련 사건
족청계 숙청
내용 요약

이범석은 일제강점기 북로군정서 교관, 고려혁명군 기병대장, 광복군 참모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군인, 정치인이다. 1900년 서울 출생으로 1915년 여운형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김규식 등과 고려혁명을 창설해 기병대장을 맡았고, 1945년 광복군 참모장이 되었다. 1948년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겸임하였다. 1953년 자유당에서 제명당한 후 참의원에 당선되었고, 1967년 신민당 출범에 이바지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으며, 유해는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고려혁명군 기병대장, 광복군 참모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초대 국무총리, 국방부장관, 참의원 등을 역임한 군인 · 정치인 ·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철기(鐵驥). 다른 이름으로 인남(麟男), 철기(哲琦) 등을 사용했다. 서울 출신. 아버지는 이문하(李文夏)이며, 어머니는 연안 이씨(延安李氏)이다. 8세 때 김해 김씨를 새어머니로 맞이하였다.

중국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광복 후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을 창설하여 청년 교육에 힘썼다. 초대 국무총리 및 국방장관 등을 역임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0년 사립 장훈학교(長薰學校)에 들어갔으며, 1913년 이천공립보통학교를 거쳐서 경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15년 여운형(呂運亨)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1916년 항저우체육학교(杭州體育學校)에서 6개월간 수학하였으며, 원난강무학교(雲南講武學校)를 수석으로 졸업하자 구대장 서가기(徐家驥)가 자기의 기(驥)에 철(鐵)을 덧붙여 ‘철기’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그 뒤 건해자(乾海子) 기병연대 견습사관이 되었으며, 1919년 신흥무관학교 교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교관, 1920년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 교수부장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청산리대첩에서 제2제대(第二梯隊) 지휘관으로 활약하였고, 1923년에는 김규식(金圭植) 등과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창설하여 기병대장을 맡았다.

1925년에는 소련합동민족군의 수분지구(綏芬地區) 지휘관으로서 소련혁명전에 참가하였으며, 그 뒤 중국항일군의 흑룡강성군(黑龍江省軍) 작전과장, 중국군 유럽군사시찰단원을 역임하였고, 1934년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한적군관대장(韓籍軍官隊長)을 지냈다.

중국육군 제3로군 참의급(參議級) 고급참모(중국군 소장), 중국군 제3집단군 55군 군단참모처장, 1940년에는 중국군 중앙훈련단 중대장을 거쳤다.

1940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한 뒤에는 제2지대장으로서 미국군과 합동작전에 참가하였고, 1945년에는 광복군의 참모장(중장)이 되었다.

1945년 8월 18일에는 광복군 정진대(挺進隊)의 일원으로 장준하(張俊河) · 노능서(魯能瑞) 등과 함께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으나 일본군의 입국 거부로 다음날 중국으로 다시 돌아간 일도 있었으며, 1946년 6월 정식으로 환국하였다.

1946년 10월에는 조선민족청년단을 결성, 비정치 · 비군사를 내걸고 국가지상 · 민족지상의 청년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주위로부터 국수주의적 극우단체라는 비난을 받아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었다. 조선민족청년단의 이러한 이념은 이후 1공화국 이승만 정부가 내세운 일민주의(一民主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1948년 정부수립과 더불어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겸임하였고, 1950년에는 주중국대사, 같은 해에 내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1951년 12월 이승만의 지시로 이기붕 등과 자유당을 창당했으며, 1952년에는 원외 자유당 부당수로 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으며, 1953년이승만의 족청계 숙청으로 자유당에서 제명당했다.

1956년에는 무소속으로 다시 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고, 1960년 자유연맹을 바탕으로 참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1963년에는 ‘국민의 당’ 결성에 참여하여 최고 의원이 되었고, 1967년 1월에는 윤보선 · 유진오 · 백낙준과 함께 4자회담을 성사시켜 통합야당 신민당 출범에 이바지하였다. 1972년 5월 11일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다.

저서

저서로는 회고록인 『방랑의 정열』, 논설집 『민족과 청년』 · 『우등불』 등이 있다.

상훈 및 추모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유해는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

참고문헌

『철기 이범석 평전』(이범석장군기념사업회, 삼육출판사, 1992)
『독립유공자공훈록』5(국가보훈처, 1988)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1(국사편찬위원회, 1972)
『우둥불』(이범석, 사상사, 1971)
『사실의 전부를 기술한다』(이범석 외, 희망출판사 1966)
『독재몽유병자-족청의 행장기-』(함토은, 정경민보사, 1954)
『방랑의 정열』(이범석 저, 송지영 역, 정음사, 1950)
『민족과 청년』(이범석, 고려문화사,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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