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붕은 해방 이후 서울시장, 국방부장관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96년 서울 출생으로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1923년 데이버대학 문과를 졸업한 후 1934년 귀국해 광산 산업을 했다. 해방 후 이승만의 비서를 지냈고, 서울특별시 시장, 국방부 장관 등을 지냈다. 이승만의 지시로 자유당을 창당하였고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하여 사사오입을 강행하였다. 1960년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4·19혁명으로 사임하였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 후 피신해 있다가 4월 28일 전가족이 자살하였다.
1915년 서울의 보성학교(普成學校)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가정형편으로 중퇴, 선교사 무스(Moose, J. R.)의 통역으로 있다가 그의 도움으로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 아이오와주의 패사디나시에서 고학으로 1923년 주립대학인 데이버대학 문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뉴욕에서 허정(許政) 등과 함께 『삼일신보』(三一申報) 발간에 참여하다가 1934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허정과 충북 영동의 광산에 투자하여 광산 사업을 했다.
광복 후 미군정청에 들어가 군정재판장의 통역을 역임하고, 민주의원 의장 이승만의 신임을 받아 비서가 되었다. 1946년 대한기독청년회 · 대한적십자사 등의 이사를 역임하면서 사회적 발판을 다졌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로서 정치적 기반이 굳혔다. 1949년 서울특별시장, 1951년 4월국방부장관에 임명되어 신성모(申性模)국방부장관 시절에 발생한 ‘국민방위군사건’을 수습했다. 같은 해 12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자유당을 창당하여 세칭 발췌개헌안 통과에 일역을 담당하였다.
1952년 대한체육회장이 되었고, 1953년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어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으로 진출하였으며, 한미재단 한국사무소장직도 역임하였다. 1953년에는 이승만의 자유당 내 족청계 제거 지시에 따라 자유당 총무부장을 맡아 박용만 조직부장 등과 함께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같은 해 12월 자유당 중앙위원회 의장에 올라 자유당의 제2인자가 되었다.
1954년 3월에 개최된 제5차 자유당전당대회에서 자기 중심의 당편제(黨編制)를 완료, 5 · 20총선에서 대승을 거두고 무소속을 포섭하여 재적 3분의 2를 넘는 137석을 확보하였다. 같은 해 제2대 민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자유당의 헌법개정선 확보를 바탕으로 이승만의 종신집권의 길을 트기 위하여 초대 대통령의 중임제한의 철폐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발의하였다가 개헌선에서 1명이 미달되어 일단 부결되었으나, 바로 다음날에 사사오입을 통해 이를 번복, 가결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같은 해 인하공과대학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56년 자유당의 공천을 받아 부통령에 입후보하였다가 낙선하였고, 그 해 제3대 민의원의장에 선출되었다. 1958년 경기도 이천선거구에서 제4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고 제4대 민의원의장이 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제5대 정 · 부통령선거에서 자유당의 공천으로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3 · 15부정선거’에 항거하는 4 · 19혁명으로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자유당정권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함께 붕괴되고, 이기붕 일가는 경무대 관사 36호실에 피신하여 있다가 4월 28일 맏아들 강석의 총격으로 집단자살하였다. 그가 살던 서대문의 집은 4 · 19혁명학생도서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