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정 ()

근대사
인물
개항기 때, 도총관, 한성부판윤,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경숙(景淑)
이칭
종정(鍾正)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18년(순조 18)
사망 연도
1883년(고종 20)
본관
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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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개항기 때, 도총관, 한성부판윤,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숙(景淑). 초명은 종정(鍾正).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礻+甫)의 14대손이며, 참판 이원달(李源達)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62년(철종 1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864년(고종 1) 부수찬(副修撰)·교리(校理)를 역임하고, 1866년부터 1868년까지 북청부사, 1870년 대사성, 1871년 이조참의·대사성, 1872년 병조참의, 1874년 도총관·동지정사(冬至正使)·공조판서를 지냈다.

청나라에 다녀온 뒤인 1875년 한성부판윤·강원도관찰사·함경도관찰사, 1878년 도총관·한성부판윤·도총관, 1880년 한성부판윤·도총관, 1882년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대원군에 의하여 발탁되어 예조판서가 되었고, 또한 국장도감제조(國葬都監提調)에 임명되었다.

민비(閔妃)의 국상발표에 신중론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연유에서였던지 예조판서로 임명된 지 4일만에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로 개차되었고, 7월 28일 군란 주동자 김장손(金長孫) 등에 대한 국문이 진행되었을 때 판의금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9월 22일 유학 김병설(金炳卨)이 민비의 의대장례문제(衣襨葬禮問題)에 있어서 찬성하였다는 점을 들어 탄핵하였으며, 뒤이어 9월 24일부터 11월 11일에 이르는 동안 양사의 연차(聯箚)를 비롯하여 이회정에 대한 탄핵이 계속된 결과 마침내 강진현 고금도에 유배되었다.

이듬해인 1883년 2월 18일 향리로 방축되었으나, 4월 대원군의 당여로 지목되어 조병창(趙秉昌)·조우희(趙宇熙)·임응준(任應準) 등과 함께 원악도(遠惡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토록 결정되었으나 뒤이어 4월 29일 사사(賜死)되었다. 그 뒤 1894년 12월 16일 칙령에 의거하여 복관되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시대사』1∼3(국사편찬위원회, 1967∼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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