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 사회의 수취는 중국 당의 세제인 조·용·조(租庸調)를 골간으로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변형을 보이는데 토지세인 조(租)와 역역동원(力役動員)인 용(庸)과 함께 수취체제의 중요한 구성을 이루는 것이 바로 공납으로서 조(調)였다. 기원은 확실치 않지만 공납제(貢納制)는 일찍부터 적용이 되어 국가의 녹봉이나 관부운영비, 각종 제사 비용, 외교비용, 전쟁·군비 등에 소요되는 각종 현물을 수취하였다.
① 삼국시대
삼국시대 부체제(部體制) 단계의 수취제도는 공납제에 기초하였다. 고대사회에서 공납은 정치체의 수장이 수확제에서 천신(天神)이나 농업신(農業神)을 제향(祭享)할 때 처음 수확한 곡물을 바치던 전통에서 기원하였고 공여된 공납물은 원칙적으로 공동체의 재생산에 필요한 공공의 비용으로 소비되었다고 한다. 공납의 부과는 곡식이나 포 또는 각 지역의 특산물로서 각부 단위로 부담이 지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주변 부속세력에 대한 수취는 아마도 종래의 지배자를 대표로 하여 집단의 생산력과 인구수를 감안하여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의 공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지만 대체로 ‘인(人)’을 단위로 곡식을 내는 조(租)와 명주·베 등으로 내는 조(調)가 있었고 ‘유인(遊人)’은 따로 3년에 한번 10명이 함께 베를 내는 조(調)를 부담하였으며 3등호로 구분되어 차등 징수된 조(租)는 ‘인(人)’ 또는 ‘유인(遊人)’에게 부과된 호조(戶調)이거나 ‘유인’이 부담하는 벼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의 공납은 조(租)로서 쌀을 거두고, 조(調)로서 베·견사·삼베 등을 거두었다는 기록이 확인되며 고구려의 ‘유인’과 같이 ‘인(人)’과 구별되는 집단이 따로 존재하지는 않았지만 수취 방식은 대체로 고구려와 유사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사비시기에 접어들어 지방제도가 재정비됨에 따라, 조(租)·조(調)를 부과하고 수취·운송·보관하는 과정은 군(郡)·성(城)·촌(村)의 단계로 내려가면서 단계적으로 할당되어 최종적으로 개별 가호(家戶)에게 거두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의 경우는 공물 납부를 보여주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대체로 고구려·백제와 유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②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시대의 조(調)는 「신라촌락문서(新羅村落文書)」를 통해 살필 수 있다. 공물은 공연(孔烟) 단위로 명주[絹], 베[布] 등이 중심을 이루었지만, 뽕나무·잣나무·가래나무 등의 그루 수와 3년 사이에 더 심거나 죽은 나무 수의 내역이 자세하게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 또한 조(調)의 수취 대상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각 촌마다 설정되어 공동으로 경작했던 마전(麻田)에서 생산된 삼[麻]도 조(調)로 수취되었다. 한편『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도 여러 종류의 비단, 실, 우황, 인삼, 가발, 조하주(朝霞紬)·어아주(魚牙紬) 등의 명주, 바다표범 가죽, 금, 은, 개, 소금, 기름 등이 보이는데, 이들 품목 또한 각 지역의 특산물로서 조(調)의 명목으로 거두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호, 즉 공연 단위로 수취한 조(調)의 부과 기준은 확실하지 않지만 공연이 9등호로 편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각 공연의 등급에 따라 9등급으로 나뉘어 차별적으로 징수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신라 국가에서는 각 촌에 포함된 공연의 등급을 합하여 그 촌의 경제적 능력을 합산해낸 계연(計烟)을 토대로 촌마다 조(調)를 할당해서 부과하고, 촌에서는 각 공연 별로 호등의 등급만큼 거두어들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 경우 호등이 높은 지배층이 많은 양의 조(調)를 부담해야만 했는데 엄격한 신분제 사회인 신라에서 이러한 수취가 이루어지기는 어렵다고 보기도 한다. 즉 공연의 호등에 관계없이 각 공연마다 같은 액수의 공물이 부과되었다거나, 호등별로 차등을 두어 징수하더라도 그 차이가 크지 않을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③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기본세는 조(租)·포(布)·역(役) 삼세(三稅)인데 국가에서는 이 삼세를 군현 단위로 전부·공물·역의 형태로 징수하였다. 고려후기에는 이러한 기본세목 이외에 상요(常徭)·잡공(雜貢)을 비롯하여 치탄공(雉炭貢)·염세포(鹽稅布)·직세(職稅)·선세(船稅)·어량세(魚梁稅) 등의 잡세(雜稅)가 보인다. 그 중 잡공은 조(調)의 명목으로, 상요는 역(庸)의 명목으로 부가된 현물세였다. 고려의 공납은 대체로 군현 내 농민들이 조·용·조 삼세를 기본으로 충당되는 현물세공으로 인식되었다.
고려전기의 수취는 대체로 일세일공(一歲一貢)하던 상공(常貢)과 아울러 부정기적으로 징수되던 별공(別貢)이 있었는데 일반 군현민에게는 조(租)·포(調)·역(庸) 삼세를 부과한 반면 부곡민(部曲民)에게는 삼세 이외에 특수한 역이 부과되었다. 공납은 일반 군현민이 부담하고 있었던 현물세와 부곡 지역민의 납공물로 이루어졌다. 1041년(정종 7) 정월 주부의 세공액을 정한 사료에 의하면, 각 군현의 한 해 납공물은 미(米) 300석(碩), 조(租) 400곡(斛), 황금 11냥, 백은(白銀) 2근, 포(布) 50필, 철 300근, 소금 300석, 사면(絲綿) 40근, 유밀(油蜜) 1석으로 규정되었다. 이 가운데 일반 군현 내의 농민이 부담할 수 있는 품목은 미곡과 포류(布類) 정도였고 나머지는 소[所:수공업을 전담하는 신량역천(身良役賤)의 거주지]의 거주민이 납공하고 있던 각종 전업적 생산품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요컨대 고려전기 공물은 군현민의 포류와 소의 산물을 일세일공하게 되어 있었던 상공과 그밖에 필요에 따라 불시에 각종 물품이 부과되던 별공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고려후기에 접어들어 공납제는 12∼13세기에 걸친 지배체제의 동요, 전시과(田柴科)의 붕괴, 군현제의 변화 등 사회변동과 장기간의 몽고 침략을 배경으로 많은 변화가 나타난다. 고려전기 기본 수취 항목이었던 조·포·역 삼세는 고종(高宗) 이후로 삼세(三稅)·상요(常徭)·잡공(雜貢)으로 개편된다. 삼세의 경우 이를 일반적 부세로서 조·용·조 삼세로 보는 견해와 단순히 전조(田租)로 보는 견해가 있고 상요와 잡공에 대해서도 이를 고려 전시기를 통해 공부(貢賦)를 구성하고 있었던 현물세로 보는 견해와 고려후기 어느 시점에 삼세 외에 부가된 현물세로 보는 견해가 있다. 대체로 삼세는 조·용·조를, 상요·잡공은 그 외의 부가세였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러므로 고려후기에 접어들어 전기의 조·용·조가 삼세로 통합되고 상요·잡공이 부가세로서 함께 부과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상요는 대개 잡공의 생산에 투여되는 노동력내지는 공역(貢役)의 물납화 현상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잡공은 조선시대 토공(土貢)과 동일한 실체로서 그 품목은 대체로 자연채취물이나 수공업제품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상요와 잡공이 함께 부과된 배경에는 12세기 이후 군현제 변동과정에서 나타난 전국적인 부곡제(部曲制) 해체 현상이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지적된다. 부곡지역의 광범위한 해체현상은 군현단위의 정액수취를 원칙으로 하였던 수취제의 특성상 과거에 소(所)로부터 충당되던 각종 전업적 산물이나 부곡지역이 지던 특수한 역을 일반 군현에 부과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후기에 접어들어 토지를 매개로 조·용·조를 수취하고 잡공이라는 명목으로 과거 소에서 납공하던 물품의 대부분을 일반 군현민에게 함께 부과함에 따라 공물수취는 공부와 잡공체계로 운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군현민의 부담이 크게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공물의 비롯한 현물세의 대납(代納)이 일반화된 것 역시 고려후기에 나타난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중기부터 나타나며 원간섭기(元干涉期)에 접어들면 일반화되었다. 그리하여 각사(各司)의 공물을 비롯하여 양창(兩倉)의 녹전(祿轉)까지도 대납의 대상이 되었으며 나아가 방납(防納)의 형태로까지 발전하였다.
공물대납의 문제는 공물수납 과정의 문제점에서 야기된 것으로 그것은 당시의 국가 및 지방의 재정상황, 상업·수공업의 발달, 상인층의 성장을 배경으로 하였다. 고려 말에는 공물의 대납이 더욱 성행하였고 이로 인한 폐단이 심해졌는데 국가에서는 공물대납의 폐단을 줄이기 위해 상평제용고(常平濟用庫)의 설치를 추진하기도 했다. 공납은 지방의 행정조직을 통하여 촌락 농민에게 분정(分定), 수취되었다. 실제 수취과정은 군현을 기준으로 중앙에서 군현, 군현에서 촌락의 두 단계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군현이 소관 촌락 내의 납공물을 수취하여 중앙으로 상납하는 중간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수취된 군현의 각종 공물은 조운(漕運)에 의해 중앙의 경창(京倉)으로 운반되었다.
④ 조선시대
조선왕조의 공물은 공안(貢案)에 수록된 정규적인 상공(常貢) 이외에 수요가 발생할 때 수시로 거두는 별공(別貢)이 있었음은 고려와 마찬가지였다.『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공물의 내역은 농업생산물을 비롯하여 가내수공업제품, 해산물, 과실류, 광산물, 조수류 등이 망라되어 있다. 공물의 부과는 해당지역의 결수(結數)와 호구수(戶口數)가 참작되었지만 그 기준은 분명하지 않았고, 수취과정도 지방관과 향리(鄕吏)에 맡겨졌기 때문에 처음부터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한편 진상(進上)은 국왕과 궁중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예헌(禮獻)’의 방식으로 상납하는 것으로서 공물과 마찬가지로 군현 단위로 배정되어 민호에 부과되었다.
공물과 진상은 관에서 마련하는 것(官備)과 민호가 갖추어내는 것(民備)이 있었는데 민호의 부담으로 돌아오기는 마찬가지였다. 공물·진상은 그 자체의 부담뿐 아니라 운반·수송에 소요되는 노동력도 요역의 형태로 제공해야 했다. 그 부과도 지역의 산물을 배정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한번 공물로 정해져서 공안에 오르면 이를 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이를 구하기 어려울 경우 상납물품을 구입하여 납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구조적 모순이 공물의 대리납부, 즉 방납(防納)을 가져왔다. 상인이나 하급관리, 권세가 등은 방납구조에 기생하여 폭리를 취하였고 그 반대편에는 소농민(小農民)의 몰락이 이어졌다.
공납제 개혁문제가 조야의 중대현안으로 떠올랐음은 물론이다. 조광조(趙光祖), 이이(李珥) 등이 공물을 쌀로 대납하는 방안인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제시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지방 차원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응하여 공물가격을 미곡의 형태로 수취하여 방납을 통해 납부하는 관행이 확산되었는데 이를 사대동(私大同)이라 한다. 대동법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사대동의 관행을 국가적 차원에서 공인한 것이었다. 대동법의 선구적 형태는 임란중인 1594년(선조27) 군량조달을 목적으로 유성룡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채택된 ‘대공수미법’이었다. 광해군 즉위 직후 이원익(李元翼) 등의 건의로 경기지역에 처음 실시된 대동법은 충청·전라·경상도 등으로 확대되어 1708년(숙종34) 전국적인 시행을 보게 되었다. 남부지역과는 달리 함경·강원·황해도에는 상정법(詳定法), 평안도에는 수미법(收米法)이 채택되었는데 본질적으로 대동법과 다르지 않다.
대동법을 둘러싸고 적지 않은 논란이 일어났고 그 시행도 1세기가 소요되었는데, 그 이유는 지세화(地稅化)된 대동을 부담해야 하는 지주층과 방납구조에 기생하면서 막대한 이득을 취하던 방납인들의 반대가 격렬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양전(量田)의 미비로 토지파악도 충실하지 못한 상태였다. 대동법은 가호 단위로 부과하던 공물·진상·잡역 부담의 상당 부분을 토지세로 편입시킨 것으로써 방납의 폐단으로 인한 국가재정의 궁핍과 농민의 몰락에 직면하여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재정 및 수취제도 개혁이었다. 대동미는 대략 결당 12두 정도였는데 미곡의 생산이 적은 지역은 전(錢)·목(木) 등으로 대납(代納)하기도 했다. 선혜청(宣惠廳)은 각처에서 대동미·대동목·대동전을 거두어 공인(貢人)에게 지급함으로써 국가의 수요품을 조달하도록 하였다.
대동법의 시행으로 공물·진상의 상당 부분이 지세화 하였으며 각종 역역(力役)의 물납화(物納化)·금납화(金納化)를 촉진하였다. 국가재정도 상대적으로나마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종래 방납인에서 합법적인 공물납부 청부인으로 떠오른 공인층은 대상인(大商人)으로 성장하였으며 이는 상업과 수공업 분야의 발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수합된 대동미는 처음에는 유치미(留置米)의 명목으로 지방관아의 경비로 절반이 비축되고 나머지는 중앙으로 상납되었으나 18세기 이후 중앙재정의 수요 증가로 상납미의 비율이 높아지고 지방유치분이 감소하는 추세가 급격히 진행된다. 이는 이후 지방재정의 곤란을 초래하는 중대한 요인으로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