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의 제15대 국왕.
이칭
성명
이혼(李琿)
별명
폐주(廢主)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75년 (선조 8년)
사망 연도
1641년(인조 19)
본관
전주(全州)
주요 관직
조선 제15대 왕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광해군은 조선의 제15대 국왕으로 15년간(1608~1623) 재위하였으나, 정변을 맞아 폐위당한 인물이다. 부왕 선조의 핍박과 명나라의 세자 책봉 거부 등 숱한 난관을 뚫고 즉위하였다. 하지만 정적을 제거하는 데 집착하면서 주로 대북 계열을 중용하였으며,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무리수까지 두었다. 마침 명과 후금이 전쟁을 벌이자, 명과는 사대관계를 유지하되 후금과도 우호관계를 맺으려 하였다. 하지만 숭명배금 노선을 절대시한 신료들의 거센 반대가 장기화하면서 국가 행정이 사실상 마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인조반정으로 폐위당했다.

정의
조선의 제15대 국왕.
가계 및 인적 사항

이름은 이혼(李琿)이며, 1575년(선조 8) 선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선조의 첫 후궁인 공빈 김씨(恭嬪金氏)이며, 형은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이다. 비는 판윤 유자신(柳自新)의 딸이며, 유희분(柳希奮)이 처남이다. 1608년(선조41) 2월에 조선의 제15대 왕으로 즉위하였으나,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군(君)으로 강등당했다. 1641년(인조19) 7월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6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부인 폐비 유씨와 외아들 이지(李祬)는 폐위당한 지 몇 개월 만에 모두 유배지에서 죽었다.

주요 활동

선조의 비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는 불임이었다. 대군이 탄생할 가망이 없자 신료들은 군(君) 중에서 세자를 정하자고 건의하였으나, 선조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몽진이 불가피해지자 신료들의 압박에 밀린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장자 임해군은 여러 악행으로 민심을 크게 잃었기 때문이다. 서둘러 비난길에 오르는 바람에 광해군의 세자 책봉 교서는 평양에서야 반포할 수 있었다.

선조가 요동 망명을 고집하자 신료들의 건의에 따라 분조(分朝)를 결정하였다. 세자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고 수개월 동안 평안도 · 강원도 · 함경도 등지를 오가며 8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독려하는 등, 국왕의 몽진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규합하는 데 공헌하였다. 또한 명나라 황제의 칙서에 따라 무군사(撫軍司)를 이끌며 야전을 누볐다. 이에 민심은 선조를 떠나 광해군에게 크게 쏠렸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선조는 광해군을 심하게 견제하였다. 명나라 장수를 접견하는 자리에 임해군을 동석시키는가 하면, 젊은 계비에게서 끝내 영창대군을 낳는 등 광해군의 세자 지위를 심각하게 흔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명나라 내부 사정으로 광해군의 세자 책봉 주청(奏請)은 무려 다섯 차례나 거절당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광해군은 어렵게 즉위하였다. 하지만 명나라는 국왕 책봉을 또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장자 임해군의 병세가 과연 사실인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 차관을 파견하는 등 새 국왕 광해군에게 씻기 힘든 수모를 주었다. 결국 책봉을 받기는 하였으나, 장자도 적자도 아니라는 출생 신분은 광해군에게 큰 트라우마로 남았다.

즉위 초에는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등용하고 서인남인에게도 두루 중직을 맡기는 등 붕당들 사이의 조제보합(調劑保合)을 꾀하였다. 하지만 한때 왕위계승 경쟁자였던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존재로 광해군은 불안해하였으며, 이는 연이은 옥사로 이어졌다. 즉위하자마자 임해군을 역모죄로 얽어 유배한 후 제거하는 한편,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한때 보인 전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을 사사(賜死)하였다.

1613년(광해군5)에는 계축옥사를 통해 영창대군을 같은 방식으로 제거하였다. 1618년 초에는 인목대비를 유폐함으로써, 4년이 넘도록 이어진 계축옥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과정에서 영창대군이나 인목대비를 보호하려던 신료들을 대거 축출하였는데, 대개는 서인과 남인이었지만 정온(鄭蘊)이나 정창연(鄭昌衍) 등 대북에서 이탈한 이도 적지 않았다. 계축옥사 외에도 광해군은 역모 고변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여, 크고 작은 고변이 꼬리를 물었고 그에 따른 갖가지 옥사가 끊일 날이 없을 정도였다.

내치(內治)에서는 오랜 전란으로 지친 나라를 추스르고 전화(戰禍)를 복구하는 정책을 펴기도 하였다. 즉위한 그해(1608) 선혜청(宣惠廳)을 두어 대동법(大同法)을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실시하였다. 광해군 본인은 대동법에 미온적이었지만, 왜란 전부터 조정의 큰 사안이던 대동법의 시행을 최초로 결재한 국왕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1611년(광해군3)에는 왜란으로 대거 발생한 은결(隱結)을 찾아내려는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수세지(收稅地)를 회복하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나라의 기틀을 다시 놓는 데 도움을 줄 서적 간행도 활발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등을 간행하고 『국조보감(國朝寶鑑)』 등을 편찬하였다.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도 새로 설치하였다. 허준(許浚)『동의보감(東醫寶鑑)』도 이때 나왔다.

나라의 체통과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는 데 필수적인 궁궐 중건에도 힘을 기울여 1610년(광해군 2)에 창덕궁(昌德宮)을, 1616년에 창경궁(昌慶宮)을 준공하였다. 하지만 이후로는 궁궐을 새로 짓는 데 집착하여 무리한 토목공사를 일으켜 민심을 잃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는 1619년에 준공한 경덕궁(慶德宮)과 끝내 준공을 보지 못한 인경궁(仁慶宮)을 꼽을 수 있다. 공사비를 조달하기 위해 무리하게 세금을 징수하는 등 큰 폐해를 낳았다.

외정(外政)으로는 1609년 일본과 일본송사약조(日本送使約條) 이른바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고 외교를 재개하였다. 한편 1618년(광해군 10) 봄 누르하치의 후금이 요동을 침략하면서 전운이 감돌았다. 명나라는 대규모 원정군을 일으키면서 조선에도 파병을 요구하였다. 광해군은 홀로 파병에 반대하였으나, 신료들의 압박에 밀려 강홍립(姜弘立)이 이끄는 1만 3000여 병력을 출정시켰다. 그러나 광해군의 예상대로 조명연합군은 개전 초기에 거의 궤멸당했고, 강홍립 휘하의 4,000여 군사는 후금의 포로가 되었다.

이후 광해군은 강홍립을 창구 삼아 누르하치와 우호적 대화를 이어가려 애썼으나, 그것을 배명(背明) 행위로 간주한 신료들은 사사건건 맞섰다. 이 외교 노선 문제만큼은 이이첨(李爾瞻) 등이 주도하던 대북도 광해군을 따르지 않았다. 숭명배금(崇明排金) 기조는 이미 광해군 당시 조야에 강고하였다.

1622년(광해군14)에는 명 황제가 감군어사(監軍御史)를 직접 파견하여 조선에 추가 파병을 명하였으나, 당장 수락해야 한다는 신료들과는 달리 광해군은 칙서 이행을 거부하였다. 감군어사가 빈손으로 돌아가자마자 모든 신료는 광해군과 논쟁하며 정청(庭請)을 이어갔다. 그 결과, 국가 행정은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졌다. 고군분투하던 광해군은 화병이 심해지고 대인기피증까지 생겼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무혈 정변(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은 국왕에서 폐위되어 유배길에 올랐다. 정묘호란병자호란이 발발할 때 유배지를 옮겼는데, 강화도‧태안‧교동도 등지를 전전하다가 제주도까지 내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1632년(인조 10) 인목대비가 죽자, 유배지에서 강제로 상복을 입었다. 폐위 후로도 19년을 생존하면서 정묘호란병자호란 및 삼전도 항복을 전해 들었다. 폐비 유씨와 나란한 광해군의 묘는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있다.

평가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시기별로 크게 달랐으며, 현재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편이다. 먼저 조선시대에는 광해군 평가가 최악이었다. 인조의 후예들이 왕위를 잇는 상황에서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 곧 인조반정의 취지에 조금이라도 해가 될 수 있는 내용은 입에 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폐주(廢主)요, 혼군(昏君)이었다.

광해군에 대한 긍정적 재평가는 1930년대 일본인 학자들이 주도하였다. 명과 후금 사이에서 광해군이 취한 노선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옥사 문제는 모두 대북 탓으로 돌린 새로운 해석이다. 이는 만주사변(1931) 이후 만주를 중국 본토에서 분리하여 한반도와 같은 문명권으로 보려던 일제 관학자들의 정치적 해석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해방 후 1959년 이병도가 그대로 수용하여 퍼트리면서 통설로 자리 잡아, 각종 교과서와 개설서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도 익숙하다.

하지만 1990년대 이래 광해군 관련 연구가 상당히 쌓이면서 통설은 그 지위를 거의 상실하였다. 무엇보다도 광해군의 외교 노선이 과연 현명한 ‘중립’ 외교였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가 거센 편이며, 내치에서도 광해군이 정적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결코 대북 같은 특정 정파에 휘둘리지 않았다는 실증적 연구가 나왔다.

아울러 광해군의 여러 업적이 다소 부풀려졌다는 비판도 무시하기 힘들다. 요컨대, 광해군에 대한 평가 문제는 시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열린 마음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
『대동야승(大東野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단행본

계승범, 『모후의 반역-광해군 대 대비폐위논쟁과 효치국가의 탄생』(역사비평사, 2021)
오항녕,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너머북스, 2013)
계승범,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푸른역사, 2009)
한명기, 『광해군: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역사비평사, 2000)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역사비평사, 1999)
稻葉岩吉, 『光海君時代の滿鮮關係』(大阪屋號書店, 1933)

논문

오항녕, 「조선 광해군 대 궁궐 공사에 대한 이해와 서술 -사실, 연구, 교육의 거리와 괴리」(『역사와 현실』 114, 2019)
계승범, 「광해군, 두 개의 상반된 평가」(『한국사학사학보』 32, 2015)
한명기, 「폭군인가 현군인가 -광해군 다시 읽기」(『역사비평』 44, 1998)
이병도, 「광해군의 대후금 정책」(『국사상의 제문제』 1, 1959)
洪憙, 「廢主光海君論」(『靑丘學叢』 20, 1935)
田川孝三, 「毛文龍と朝鮮との關係について」(『靑丘說叢』 3, 1932)
관련 미디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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