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홍립은 조선시대 한성부우윤, 순검사, 오도원수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560년(명종 15)에 태어나 1627년(인조 5)에 사망했다. 1597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했다. 광해군 재임시 명이 후금을 치기 위해 원병을 요청하자 오도원수로서 군사를 이끌고 출병했으나 연합군이 대패하자 후금에 투항했다.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광해군의 밀명에 따른 것이었다. 포로로 억류되었다가 정묘호란 때 후금군의 선도로서 입국해 화의를 주선한 뒤 국내에 머물렀다. 역신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했다가 사후에 복관되었다.
1589년(선조 22) 진사가 되고, 1597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로 급제, 설서(說書) · 검열(檢閱) 등을 거쳐, 1605년 도원수 한준겸(韓浚謙)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이해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보덕(輔德)이 되고, 이듬해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1614년 순검사(巡檢使)를 역임한 뒤 1618년에는 진녕군(晉寧君)에 봉해졌다.
이때 후금(後金)이 명나라 변경을 침입하는 등 세력을 확장하자, 명나라는 후금을 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청해왔다. 조정에서는 후금을 의식하면서도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원병을 보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출병을 결정했다. 강홍립은 오도원수(五道元帥)가 되어 부원수인 김경서(金景瑞)와 함께 1만 3000여 군사를 이끌고 출병하였다. 1619년 명나라 제독(提督) 유정(劉綎)의 군과 관전(寬甸) 방면에서 합류해 동가강(佟佳江)을 따라 회인(懷仁)에서 노성(老城)으로 향했다.
이들 조 · 명 연합군은 일제히 공격을 시작해 앞뒤에서 적을 협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작전에 차질이 생겨 부차(富車)에서 대패했다. 이때 강홍립은 “조선군의 출병이 부득이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남은 군사를 이끌고 후금군에 투항했다. 이는 출정 전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고 한 광해군의 밀명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조정에서는 강홍립의 관직을 박탈했다. 투항한 이듬해 조선 포로들은 석방되어 돌아왔으나, 김경서 등 10여 명과 계속 억류당하다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후금군의 선도로서 입국해 강화(江華)에서의 화의를 주선한 뒤 국내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역신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했고 죽은 뒤에야 복관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