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시대 전라도병마절도사, 정주목사, 평안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한 무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593년 1월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의 원군과 함께 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운 뒤,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도원수 권율(權慄)의 지시로 남원 등지에서 날뛰는 토적을 소탕하였다.
1595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을 때, 선조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이틀 만에 동래부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송상현(宋象賢)의 관을 적진에서 찾아오라고 하자 그 집 사람을 시켜 일을 성사시켰다. 또한, 이홍발(李弘發)을 부산에 잠입시켜 적의 정황을 살피게 하고, 일본 간첩 요시라[要時羅]를 매수해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였다.
1597년 도원수 권율로부터 의령의 남산성(南山城)을 수비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불복해 강등되었다. 그 뒤 1603년 충청도병마절도사로 군졸을 학대하고 녹훈(祿勳)에 부정이 있어 파직되었다가, 1604년 전공을 인정받아 포도대장 겸 도정(捕盜大將兼都正)이 되었다.
1609년(광해군 1) 정주목사를 지내고, 이어 만포진첨절제사(滿浦鎭僉節制使)와 북로방어사(北路防禦使)를 역임하고, 1615년 길주목사, 1616년 함경북도병마절도사, 2년 뒤에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 때 명나라에서 임진왜란 이후 세력이 강성해진 건주위(建州衛)의 후금 정벌을 위해 원병을 요청하자,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원수가 되어 원수 강홍립(姜弘立)과 함께 출전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 심하(深河) 지방에서 전공을 세웠으나, 살이호[薩爾滸]의 전투에서 명나라 군사가 대패하고 선천군수 김응하(金應河), 운산군수 이계종(李繼宗) 등이 전사하자 강홍립과 함께 후금에게 부득이하게 출병했음을 알리고 잔여병과 함께 투항하였다.
포로가 된 뒤 비밀리에 적정을 탐지한 기록을 고국에 보내려 했으나 강홍립의 고발로 탄로나 처형되었다. 우의정에 추증되고 향리에 정문이 세워졌다. 시호는 양의(襄毅)이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만력11년계미9월초3일별시방목(萬曆十一年癸未九月初三日別試榜目)』(국립중앙도서관[한貴古朝26-28-6])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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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무과 급제 : 『만력11년계미9월초3일별시방목(萬曆十一年癸未九月初三日別試榜目)』(국립중앙도서관[한貴古朝26-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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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우의정 추증 및 정려 : 『정조실록』 32권, 1791년(정조 15) 1월 25일. "고 부원수 김경서의 마을에 정문을 세우고 시호를 추증할 것을 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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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시호 양의 추증 : 『정조실록』 44권, 1796년(정조 20) 4월 8일. "김경서·조헌·신만 등에게 시호를 추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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